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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지호 李智鎬
1970년 충남 부여 출생. 2011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bunsmile@naver.com
서늘한 지점
한쪽 손이
다른 쪽 손톱을 깎을 수 있다는 것은 서글픈 생이다
자라면 자란 만큼 깎아야 하는 밭은 생의 손톱들
계약서 일조 일항의 내용은 웃자람을 경계하라,지만
짧은 그 밤에도 초승달이 뜬다
작은 풀들이 까치발로 고개 내밀 듯 자란
파르라니 어린 어둠을 깎는다
떠나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슬플 때마다 돋는 허기진 손톱 달
분노에 찬 냉기는 어디쯤 던져야 할까
지루한 오르막과 헐렁한 내리막
스밀 수 없는 임계점
저 서늘한 지점
한 몸도 버려진 기억이 되면
뫼비우스 띠같이 끔찍한 일상이 된다
새까만 손톱 밑의 시간 같은 계약일
톡 톡 톡
짧게 더 짧게 깎이고 있다
열 손가락 열개의 손톱 다 깎고 없다
한 몸통에 걸려 있었으나 나뉘어야 할 시간
뼈도 껍질도 피부도 아닌
가까운 각질의 이름 하나 당신에게서 빠졌다
방향 없이 튕겨나가는 손톱
그늘진 의자 밑으로 밀려났다
손톱은 절정도 짧고 낙하도 짧다
손톱깎이는 여전히 잘 들고
시간은 빨리 자란다
은 나와라 뚝딱
반짝 펼쳐졌다 걷히는 새벽 도깨비시장
길바닥 사과궤짝 낡은 옷걸이에 출몰한 도깨비 잡으러 모인 사람들 온갖 흥정을 쏟아낸다
그 옛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허약한 술 한잔에도 도깨비들과 싸운 길목이 있었다 막걸리 뚜껑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붙어 사람들의 허리춤을 붙잡기도 하고 가을걷이 끝난 헛헛한 저녁에 매달려 패를 뒤집기도 했다 까막눈에도 먼 곳의 불빛으로 보이던 도깨비들
어떤 날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 땡그랑 몇푼으로 들어 있기도 하고 열무 몇단의 파릇함에 숨어 있기도 했다 찾는 자와 숨은 자 사이 숨바꼭질을 끝내는 것은 여명에 가려진 아침 해였다
도깨비길을 지나간다 시선과 바퀴 사이에 숨어 내려가는 오르막과 올라오는 내리막을 조종하고 있는 도깨비, 어물전 생선눈알같이 바람 부는 방향을 진짜라 믿었다 진짜배기 흐름은 바람이 아니라 바닥에 또르르 굴러가는 공 속에 있었다
도깨비가 출몰하지 않는 도깨비시장
도깨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뚝딱, 도깨비 방망이 한번만 두드리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