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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홍일표 洪壹杓
1958년 충남 천안 출생.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매혹의 지도』가 있음. phyo58@hanmail.net
사행천
뱀이 남긴 것은 밀애의 흔적입니다 어디에 가도 꽃의 언저리를 감도는 붉은 숨결입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시냇물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한마리 뱀으로 당신을 휘감습니다 가끔 반짝이는 웃음소리에 돌들이 물방울처럼 튀어오르고 나는 둥글게 부풀어오른 만조의 바다가 됩니다
풀숲을 빠져나간 뱀이 허리띠로 감겨 있습니다 진달래 눈부신 해안선을 들고 봄의 옆구리로 향하던 사랑이었습니다 머리 흰 사내였던가요? 파도를 타고 내달리던 미명의 노래였던가요? 동해를 묶은 길고 눈부신 바닷길에서 풀려나오는 푸른 뱀의 무리를 봅니다 수만마리 불멸의 젖은 영혼들입니다
마침내 멀리 돌아온 길이 하늘로 향합니다 밤바다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산과 바다를 지나 슬픔의 곡절 다하는 허공에 닿습니다 온몸이 붉은 몸부림으로 뜨겁습니다 공중으로 날아간 뱀들이 마른 나뭇가지를 타고 분홍빛 봄비로 내려옵니다 눈 밝은 사행천이 장음의 맑은 곡조로 흘러가는 연록의 들판입니다
동굴 이야기
남은 건 한개의 달이 전부입니다 달을 잘게 부수어 여기까지 왔지만 이젠 반딧불이 몇점밖에 남은 게 없습니다 하늘 밖에서 동굴을 끌어와 자주 방 안을 채웁니다 잘 보이진 않지만 오래전 발굴된 역사의 환기구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왼손이 있나요?
자꾸 잠이 옵니다 머리맡까지 내려온 동굴을 만져봅니다 아, 이건 기다란 탯줄입니다
밤마다 동굴이 내 몸을 먹고 있습니다 점점 몸이 작아지고 손발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지워지고 있습니다 바깥은 비가 내리고 귀가 없는 동굴은 빗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나를 읽느라 눈이 사라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개의 눈을 갖고 있어 밤은 숨을 곳을 찾지 못합니다
동굴이 나를 뱉어내는 순간 제 울음소리에 놀라 깨어나는 축축한 잠이 있습니다 혼자 우는 차가운 돌이 텅 빈 집을 두리번거립니다
동굴을 목에 두르고 집 밖으로 나갑니다 동굴이 빗물에 녹아 흐르기도 하고 검은 구렁이로 어둠을 넘어가기도 합니다 늙은 배우 같은 역사는 낡은 필름을 돌립니다 앞산의 여래입상이 슬며시 웃고, 잠시 그쳤던 비는 어제의 방식대로 가문비나무 잎사귀를 적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