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섬과 바다의 인간학
한창훈 소설집 『그 남자의 연애사』
구모룡 具謨龍
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평론집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시의 옹호』 등이 있음. kmr@hhu.ac.kr
내륙 중심의 시각으로 섬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다. 한창훈(韓昌勳)은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산 작가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그의 소설은 인류학에서 말하는 참여-관찰의 소산이다. 참여-관찰은 나와 타자의 상호소통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전지(全知)의 시점에 의한 서술로 나타난다. 1인칭이든 3인칭이든 전지 시점은 작가의 전기적 목소리를 작품 속에 담게 된다. 신뢰성있는 서술자는 서술의 리얼리티를 보증한다.
『그 남자의 연애사』(문학동네 2013)에 실려 있는 아홉편의 소설 가운데 「내 사랑 개시」를 제외한 모든 소설의 공간이 섬이다. 그만큼 그는 섬이라는 주변의 시각으로 경험적인 삶을 서술하고 있다. 「그 남자의 연애사」에 극화된 “한동안 섬에서 살기로 작정한 나”나 「뭐라 말 못할 사랑」에 등장하는 ‘작가’는 소설 밖에 있는 작가와 구분되지 않는다. 작가는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전달한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들이 ‘연애’라는 테마에 맞춰져 있다. 얼핏 통속으로 흐를 가능성을 안고 있지만 ‘섬’이라는 서사 공간이 이를 차단하는 기제가 된다. 섬이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섬이란 이런 곳이었다. 그날 이장에게 들어본 바로는, 상당수 사내들이 화류계와 맺어졌는데 이렇게 사라져버린 경우가 잦았고, 붙인 정이 제법 가거나 또는 의리상 몇년 살다가 떠나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 아이 낳고 해로하는 부부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그 남자의 연애사」) 그러니까 ‘섬’은 고립된 듯 보이지만 유입되고 유출되는 이주와 이동의 공간이다.
섬으로 유입되는 사람들은 대개 뭍에서 좌절하거나 상처를 입은 이들이다. 이들에게 섬은 위안과 행복의 공간이 아니다. 사랑과 배신, 만남과 헤어짐, 고통과 죽음은 이들의 인간사를 형성하는 줄기들이다. 작가는 연애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섬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양상을 서술한다. 그렇다면 왜 연애인가? “연애란, 어쩌면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돈을 선택하는 것으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그 남자의 연애사」)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일까? 작가가 단지 낭만적 사랑의 부재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듯 섬은 낭만과 환상의 공간이 아니며 상처입고 훼손된 사람들이 마침내 떠밀려와 살다 가는 곳이다. “산이 국내라면 바다는 국제적인 곳”(「발」)이라는 진술이 말하듯이 바다를 통하여 삶도 죽음도 생성하고 확장된다. ‘인어’ 모티프를 변용한 「뭐라 말 못할 사랑」이나 광기와 죽음이 일상화된 섬과 바다를 그리고 있는 「발」에서 열린 바다의 무한 앞에 선 사람들의 삶이 보이는 초라함이 여실하다.
우정 또한 연애의 한 형식이다. 「애생은 이렇게」 「판녀」 그리고 「무적이 운다, 가라」는 작가의 지향이 우애의 공동체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랑하는 대부분의 것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의 사랑이 늘 그런 것처럼 사랑은 소유와 아무 상관없다”(「애생은 이렇게」)는 ‘애생’의 인식이나 화가를 지망하는 창녀 ‘판녀’에 대한 성적 지배관계를 넘어선 ‘나’의 사랑이 돋보인다. 「판녀」는 중국의 화가 ‘판위량’의 삶에 기댄 서술이지만 ‘독한 상처’를 이겨낸 이들의 우애가 의미심장하다. “술과 사랑. 그것 없으면 섬에서는 못 산다”(「애생은 이렇게」)고 한다. 「무적이 운다, 가라」는 이러한 섬에서 전개되는 우정의 드라마다. 병들어 섬으로 귀환한 친구를 살리고 자신은 사업 실패로 자살하는 어선 선장의 이야기는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해양서사의 진면목에 육박한다. 「그 여자의 연애사」 또한 항구와 포구를 거느린 섬의 풍속에서 있을 수 있는 사랑을 말한다. “희망과 좌절은 손바닥 앞과 뒤”(「그 여자의 연애사」)라는 ‘여자’의 경험적 인식은 사는 곳이 섬이라는 데서 더욱 절실하다. 끝에 실린 「그 악사의 연애사」 는 첫머리에 놓인 「그 남자의 연애사」와 수미상응한다. 상처를 안고 섬으로 들어온 그의 사랑과 돌연한 죽음은 이 소설집의 결미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다. “죽음은 늘 느닷없다. 특히 바다에서는 더 그렇다”(「그 악사의 연애사」). 작가는 후기에서 “사랑은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죽음 아니면 사랑이다. 삶은 반복되는 연애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 남자의 연애사』는 한창훈의 독창적인 인간학을 제시한다. 그의 인간학을 형성시킨 바탕은 섬과 바다이다. 섬과 바다에서 그는 무수한 이웃들의 삶을 보아왔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우리 해양문학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섬과 바다의 사회사는 내륙의 사회사와 다르다. “법이라는 것이 나보다 바다를 더 잘 알아?”(「애생은 이렇게」)라는 최노인의 주장처럼 우리는 내륙의 ‘법’에 따라 섬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섬이라는 주변의 시각으로 섬의 인간학을 서술한 한창훈의 『그 남자의 연애사』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