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제니
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등이 있음.
mydogandme@naver.com
거의 그것인 것으로 말하기
오래전 너는 내게 시 한편을 번역해 보내주었다. 언어의 죽음 혹은 언어와 죽음에 관한 시였고 나는 오래도록 그 시를 사랑하여 소리 내어 읽고는 했다. 이후 나는 내가 모르던 그 언어를 익히게 되었고 그 시를 번역하게 되었고 오래전의 내가 그 시를 오독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몇년 뒤 어느날 나는 네가 머물던 도시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너는 기꺼이 나의 동행이 되어주었는데. 이전에 나는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어떤 연유로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도시는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 도시의 식물원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임에도 인공적 구조의 조화로움이 아직 쌓이지 않은 시간의 온기마저도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었다. 곳곳에는 나무의 이름을 사랑해서 울고 있는 것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정원사는 식물의 낱말을 가로지르며 풀과 잎과 뿌리의 시간을 지켜내려 애쓰고 있었다. 계절은 꽃과 나무들 위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지만 어떤 심장은 두번 다시 뛰지 않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순간의 순간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을 때. 알고 있던 사실들 위로 모르던 사실들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한겨울 허공에서 흩날리는 흰 눈의 하염없는 움직임처럼. 벽을 짚으며 걸어가는 눈먼 사람의 간절한 더듬거림처럼. 때로는 경험하지 않은 일이 경험한 일보다 더욱더 진실되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었고. 너와 내가 식물원의 사이사이를 걸어 다닐 때 과거의 미래의 과거의 미래의 과거를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고 느꼈고. 그때. 과거의 미래의 언어의 죽음의 문장을 경유하여 도착하는 목소리가 있어 어느날의 행인은 걸어가던 자신의 걸음을 문득 멈춘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역과 오독의 결과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식물원의 한 나무 앞에서 오늘 다시 걸음을 멈춘다. 우리는 오래전 다른 도시에서도 한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 적이 있었고. 그때처럼 너는 우리 앞에 서 있는 나무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내가 알던 이름은 아니었지만 나무의 색과 향은 남몰래 사랑해왔던 나무와 같았으므로 나는 내가 아는 나무의 이름을 너에게 일러주었다. 몇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나무는 우리가 떠나고도 한참을 따라오고 있었다. 사람을 놓친 적이 있는 마음이 나무의 향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부르면 따라오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따라온다. 다시 어제의 향기 같은 것들이.
거의 그것인 것 같은 것들이 다시 우리의 곁으로.
빈칸과 가득함
우리는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여럿이었으나 우리는 나아가지 않았고. 그렇게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무수한 가능성이 되어 우리 앞에 남겨진 채로 이제는 잊을 수 있게 된 어떤 일이 우리를 우리로 묶어놓는다. 나아가지 않은 날들에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꿈을 꾸겠다고. 나아가지 않은 길들에 대한 열망과 맹렬히 질주하는 감각은 여전히 간직한 채로. 오직 연습 연습 연습만이
라고 적힌 벽에는 빈칸이 가득하다. 오직 연습만이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단련되는 정신에 대해 말하던 어느날의 네가 있었고. 나아가지 않은 방향은 여전히 우리의 앞에 남겨진 채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무들처럼 무수한 가지와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다.
너는 빈칸의 얼굴을 하고 있고. 빈칸의 걸음을 하고 있어서. 빈칸은 채워질 수 있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빈칸과 나는 많은 것을 함께해왔고. 함께 걸어오는 동안 나와 빈칸은 빈칸 구역이라 불릴 만한 영역으로까지 자리를 넓혀갔다. 이를테면 거의 그것이 될 뻔한 무엇 가까이. 기억의 그늘을 키워가면서 다가갈 수 없는 것들에게로 다가갔다. 채워지기 직전의 흐릿한 확신을 잠재적으로 품고서. 그러나 죽은 사람의 영혼은 보이지 않고
그러나 너는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까지 나아간다.
새롭게 마주하는 이전과 이후의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서
어떤 말은 빈칸의 공백을 몰아내는 방식으로 밀어내고 있었고.
빈칸은 빈칸 아닌 것들로부터 줄곧 영향받아왔다. 빈칸은 그 자신의 여백에 의해서 흔들리면서 변주되고 있었다. 아득하게 가득하게 이름 없이 남겨진다는 것. 한마디 대사도 없이. 인물의 움직임도 없이. 오직 침묵으로만 채워지는 어떤 예외적인 영화들처럼. 그리고. 그러다. 장면은 불현듯 전환된다. 새로운 영화적 언어가 필요하다는 듯이. 어떤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악에 의해 장면은 이전과는 다른 공기를 덧입는다. 인물은 다른 시공으로 도약한다. 서사는 말하지 못한 말들을 품으며 돌연 풍성해진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하나둘 사람들이 객석을 떠나는 그 순간에. 음악은 다시 한번 우리를 우리 아닌 자리로 들어 올린다.
그 노래는 두려움 없이 마음속 이야기를 하리라
네 마음
네 마음이 내 마음 안에
네 마음이 내 마음 안에 있다면
내 마음
내 마음이 네 마음 안에
내 마음이 네 마음 안에 있다면1
우리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끝없음에 관하여 끝없는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것으로 다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너는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감각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밖 없는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매 순간 자기 자신이 되고자 했지만 자기 자신이 아닐 때에도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도대체 자기 자신이 아닌 순간이란 어떤 순간인 것일까. 죽음 너머로부터 들려오고 있는
이미 흘러간 목소리는 비현실적으로 현실적이어서 우리가 사랑했던 오래전 나무를 흔들고 또 흔들고 있다. 빈칸은 가득함으로 가득하다. 빈칸은 아득함으로 아득하다. 암전. 더는 보이지 않는 화면 너머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하나의 묘사를 건너뛰기. 하나의 사건을 건너뛰기.
물컵을 바라보는 시간만큼 존재를 잊는 연습을 할 것.
더는 그곳에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꿈을 꾸겠다는 다짐을 하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더는 기다리지 않는 것으로 지나간 얼굴은 하나의 단단하고 굳건한 빈칸으로 남겨진다.
연습 오직 연습만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던 어떤 벽을 생각한다.
그것은 누구의 벽이었을까. 다만 어둡고 가득한.
—
- 영화 「쁘띠 마망」(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