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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소진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갈라파고스 2021
여성노동자의 시간을 사유하다
최시현 崔時賢
연세대학교 학술연구교수, 여성학 sihyunc@gmail.com
오랜 이웃이 몇년째 동네 기업형 슈퍼마켓 매장에서 시간제 캐셔로 일한다. 그녀가 늦은 시간에 근무하기에 나도 기왕이면 저녁에 마트를 들르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계산대가 모조리 셀프계산대로 바뀌어 있었다. 두개의 계산대로 충분히 운영하는 매장이었는데 셀프계산대는 네개였다. 예전과 달리 그녀에게 말 한마디 붙일 틈이 없었다. 그녀는 홀로 많은 계산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허둥지둥하는 손님들의 계산을 일일이 봐주고, 주류처럼 확인이 필요한 물품에는 직원카드 인증을 해주고, 종량제 봉투를 내어주고, 포인트를 적립해주는 모습은 지켜보기만 해도 정신이 없었다. 너무 고생스러워 보여 한마디 했더니 “(셀프계산대 도입 이후) 정직원은 다 잘렸어. 나 같은 알바만 죽어나는 거야. 화장실도 가기 어려워”라며 대뜸 핸드폰을 꺼내 걸음수를 보여줬다. 만보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늘 일한 단 몇시간 동안 이 정도”라며 “일 마치면 이만보는 보통”이라는 말끝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노동환경의 변화는 그에게서 동료와 시간 모두를 빼앗아갔다. 일터는 삶의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노동자의 시간은 고용주의 것으로 간주된다. 고용주가 노동자로부터 시간을 구매한 댓가로 지급하는 것이 임금이라는 생각은 노동자와 노동력을 분리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가정에서 출발한다.
여성노동 연구자 이소진의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은 캐셔노동자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며 추진된 표준노동시간 단축이 캐셔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사회적 삶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상식’을 반박하는 경험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중년여성의 일자리인 대형마트에서 노동시간의 단축이 이 여성들의 사회적 시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노동구조에서 시간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부가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시급 인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서면서 대기업 산하의 B대형마트는 자사 노동자의 표준노동시간 단축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2018년 1월부터 이 마트의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에서 7시간으로 한시간 단축됐다. 추가고용도, 임금감소도 없을 것이라고 회사는 강조했지만 B마트의 노조는 이를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머지않아 임금이 감소하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저자는 노조의 공식발표에서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반대’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이 일에 직접 뛰어들었고, 여성노동자들에게 더 절실한 문제는 사실 “한시간의 임금보다 한시간의 휴식”(31면)이라는 점을 밝혔다.
책의 1, 2부에서는 대형마트 시간제 일자리에 중년 기혼여성이 주로 임하는 이유와 이 일이 저임금·불안정 노동으로 지속되어온 구조를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세계 분석과 함께 가족임금제,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 이상적 노동자 규범, 노동시장 이중구조론, 포괄임금제, 프레젠티즘(presenteeism) 등의 개념을 통해 검토한다. 이 책이 가진 미덕은 이와 같은 복잡한 개념들을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사회적 통념의 형성과정과 작동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중년 유자녀 여성들이 왜 유순하고 안전하며 착취하기 좋은 노동자로 간주되는지, 왜 마트노동이 여성에 걸맞은 직종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마트캐셔가 중년 기혼여성의 일자리로 정착한 것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여성노동자에 대한 통념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자녀를 둔 여성은 기혼자로 상상되고 기혼여성은 생계부양자인 남편의 아내이자 가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주부로 간주된다. 즉 결혼한 여성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노동시장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용돈을 버는 ‘취업주부’”(98면)라는 편견이 작동한 결과가 시간제 마트노동에 중년여성이 주로 일하게 된 문화적 배경이다. 게다가 마트노동자에게 요구되는 성실성과 친절함은 ‘엄마의 자질’로 기대되기에 응당한 보상이 필요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특히 자녀가 어리지 않으니 육아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가정하에 회사는 중년 기혼여성의 시간을 고용주가 “마음대로 배치해도 괜찮은 시간”(252면)으로 처리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이제는 하나의 정언명령처럼 받아들여지는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는 패러다임에 대해 다시 사유할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일과 생활의 균형을 도모한다는 명목하에 기업이 도입한 새로운 방식의 시간분배방식인 단축근무 및 유연근무제가 역설적으로 대형마트 캐셔노동자의 일과 삶 모두에 불균형을 초래하고 자율성을 박탈했다는 것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밝힌다. 가령 책의 3부에서는 캐셔노동자가 감당하는 도를 넘는 불예측성과 사회적 시간의 소멸로 이를 분석한다. 단축근무제를 실시하면서 대형마트는 최소한의 노동력으로 노동자들을 최대한 유연하게 조정하여 마트에 배치해 수익성을 극대화한다. 이와 같은 순환형 교대제에서는 관리자가 세부 스케줄을 공지하기 전까지 노동자들은 출근시간을 알 수 없다. “‘쪽대본’ 스케줄”(246면)이라고 연구참여자들이 명명하는 심각하게 예측 불가능한 노동시간을 마트노동자들이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사례로 제시된 한 지점은 빨라야 근무일 2~3일 전, 늦으면 하루 전 사내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출근일정을 공지한다. 또다른 지점은 파트장이 임의로 개인별 휴무를 배치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예측할 수 있는 휴무는 오로지 대형마트 의무휴업일뿐이다. 출근시간과 휴무일의 예측 불가능성은 일터의 시간뿐 아니라 일터 밖에서의 시간까지도 회사에 저당 잡히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가치체계는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어 있다고 전제할뿐더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일터에서의 시간을 최대한 압축적으로 사용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일터에도 삶은 버젓이 존재한다.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근무시간 배치의 유연화·세분화는 노동을 준비하는 시간을 노동시간 밖에서 쓰게 만들고 강한 노동강도와 감정노동으로 인한 고단함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동료들과의 상호작용마저 차단한다. 게다가 일을 수월하게 만드는 업무정보 교환도 어려워져 노동생산성의 질적 증진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지금까지 여성노동을 둘러싼 많은 문제는 경력단절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다뤄져 왔으며, 이러한 프레임은 생산 노동의 연속성을 중심으로 여성의 시간을 사유하도록 이끌었다. 이 책 또한 경력단절 이후 재취업한 생산 노동 현장에서 여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상세히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여성의 노동은 이러한 영역 외에도 사회적 재생산 전반에서 이뤄진다. 생산 노동 중심의 사고방식과 일 중심의 생애 기획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재생산 노동을 포괄하는 노동 패러다임의 여성주의적 전환이 요청된다. 이 책이 시사하듯 결국 바꿔야 할 것은 여성의 시간을 볼모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성별화된 노동구조다. 그렇다. 모든 것은 시간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