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퀸 핀’의 마음
이지은 李知垠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지방-여성의 장소」 「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 등이 있음.
rararra01@naver.com
첫번째 매듭, 두번째 장
소설 속 인물들이 작가와 함께 삶의 과정을 통과해나가는 경우가 있다. 김유담은 첫번째 단편집 『탬버린』(창비 2020)에서 대학진학을 계기로 집을 떠나는 딸들, 경장편소설 『이완의 자세』(창비 2021)와 최근 연재(창비 스위치 2021.7~12)를 마치고 출간을 준비 중인 장편소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에서 꿈을 상실한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여성 청년들에 주목했다. 그리고 얼마 전 출간된 두번째 소설집 『돌보는 마음』(민음사 2022)에서는 육아와 간병, 가사노동과 일에 숨 돌릴 틈 없는 여자들의 삶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는 제 삶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아마 소설을 읽으면서 눈치채는 독자들도 있을 텐데, 『탬버린』과 『돌보는 마음』 사이 변화가 있었어요.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되었거든요. 『탬버린』에는 습작을 할 때 구상한 소설들이 많이 실려 있어요. ‘나중에 작가가 되면 이런 이야기를 쓸 거야’ 하고 마음에 오래 품고 있던 이야기들이죠. 『이완의 자세』 『커튼콜은 사양할게요』도 저의 이십대를 생각하면서 썼고요. 그러니까 사실 이 책들은 제 청춘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 시절을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청춘 3부작’이라고 이름 붙여봤어요. 한 시절이 세권의 책으로 묶여서 정리되고 난 뒤에는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미워하던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반면, 『돌보는 마음』에 묶은 단편들은 그때그때 저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들을 쏟아내듯이 쓴 소설들이에요. ‘이렇게까지 날것으로 써도 되나’라는 고민이 들 만큼 지금 손에 잡히는 이야기들을 썼어요. 날것의 이야기가 주는 카타르시스 같은 문학적 효과가 있더라고요. 소설의 구성이나 상징적 장치 등을 고안하는 데 고심했던 『탬버린』에 비해 제 딴에는 제법 과감한 시도를 한 작품집이라 할 수 있어요.
‘날것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김유담의 말처럼 『돌보는 마음』에는 돌봄노동의 실감 나는 현장이 드러난다. 가령 산모에게 조리원은 “완전 젖소 취급을 받으면서 남편 앞에서 난데없는 젖 쇼”(「조리원 천국」 136면)를 하는 무대이고, 워킹맘에게 베이비시터의 집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스릴러영화의 세트다. “CCTV 앱을 켰다. (…) 아이의 모습을 도통 찾을 수 없었다. 거실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서 확인해야 했다.”(「돌보는 마음」 188~89면) 여기에 ‘영끌’ 하우스푸어 아내의 짠내 나는 분투, 정자은행을 통해 아이를 얻은 비혼 싱글맘의 삶, 감염병 재난으로 인해 돌봄노동의 삼중고, 사중고에 처한 노년 여성의 곤경 등은 오늘날 사회가 돌봄의 방식을 어떻게 변형하고 있는지 예민하게 보여준다. 이런 생활밀착형 소설들은 현실의 디테일을 풍부하게 구현함으로써 돌봄의 문제를 가장 문학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무엇보다 소설들은 가부장제 가족제도가 여성들에게 할당하는 일인 다역에 주목한다. 이때 ‘다역’이란 딸·아내·할마(할머니 엄마)라는 삼중, 사중의 역할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과중한 노동을 의미하기도 하고, 엄마이자 시어머니, 며느리이자 시누이처럼 관습적 가족 규범에 비추어 적대적인 관계라 할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모순적인 위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요컨대 『돌보는 마음』은 관계의 입체성과 생활의 구체성, 그리고 문제의 시의성을 장착한 ‘지금 여기’의 소설들이라 할 수 있다. 김유담이라는 세계의 두번째 장(章)이 펼쳐진 것이다.
핀 캐리와 하드 캐리, 그녀들의 밸런스게임
‘청춘 3부작’에서 『돌보는 마음』으로의 이행에는 여러 변화가 감지되지만, 작품세계의 구심점에는 여전히 ‘가족’이 도사리고 있다. 식구(食口)는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지만, 『탬버린』 속 딸들에게 가족은 변기를 공유하는 사이, 그러니까 지저분한 속사정을 자꾸만 보여주는 지긋지긋한 관계로 감각된다. 이들은 대학진학과 취업을 계기로 집을 떠나는 데 성공하는 듯하지만,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생계는 이들을 자꾸만 떠나온 자리로 다시 끌어당긴다. 특히 지방 출신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자신이 경제적·문화적 주변부에 속해 있다는 위치 감각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서울은 익명적 타인들의 대도시임에도 조금만 자세히 보면 외부인이 섞이기에 쉽지 않은, 학군과 계층에 의해 조밀하게 구획된 좁은 바닥이다(「가져도 되는」). 뿐만 아니라 무심코 내뱉은 남자친구의 악의 없는 말에도 ‘나’의 위치성은 재확인된다. “난 지방에서는 못 살 거 같아”(「멀고도 가벼운」 192면).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제법 근사한 미래가 그려질 거라 믿었던”(「공설운동장」 68면) 여성 청년은 서울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걸 이내 깨닫지만, 그럼에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느라 늘 고단한 엄마의 세계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한다. 그녀들에게 가족은 미래를 결정지어버린 현실적 조건으로 원망의 대상인 동시에 떠나온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책감과 연민의 대상이다.
이때까지 낸 책 세권을 보면 제가 가족관계에 천착하는 것 같기는 해요. 아마 제가 ‘K-장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일 수도 있겠어요. 저는 가족이 일종의 굴레 같다고 생각한 적이 많아요. 가장 가까우면서 서로에게 제일 큰 상처를 주는 존재라는 생각도 자주 했고요. 그게 집약적으로 드러난 소설이 등단작 「핀 캐리」예요. 한국사회에서 가족이란 마치 볼링 핀처럼 각자 잘 서 있을 땐 문제가 없지만, 하나가 쓰러질 땐 다 같이 휘청거리거나 휩쓸리죠. 사회안전망이 약하니까 누군가 아프거나 곤경에 처하면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요.
「핀 캐리」에서 볼링 핀은 가족에 대한 은유다. 오빠는 스페어 처리가 스트라이크보다 어려우니 “식구끼리는 서로 붙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내심 “처치 곤란한 스페어, 그래서 포기해야 하는 스페어가 아니라, 아예 다른 레인에 스스로를 세워보겠다고”(23면) 다짐한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 이후 ‘나’가 아프게 깨닫는 것은 바로 자신이 ‘처치 곤란한 스페어’였다는 사실이다. ‘나’의 대학진학이 오빠를 가장의 자리에 붙들어놓았듯 가족은 서로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다시 말해 하나의 핀이 넘어지면서 다른 핀을 함께 넘어뜨리는 ‘핀 캐리’(pin carry)가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는 관계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는 가장자리에 있는 10번 핀 단 하나만 아웃시키고 싶어하지만 스트라이크를 치고 만다. 이는 볼링 핀이, 아니 가족이 “각각 떨어져 있지만 완전히 독립적으로 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러한 관계의 구속을 혼자 깔끔하게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족은 “무너지는 순간에는 서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 도망가려 해봤자, 강한 힘이 덮쳐버리면 결국 한꺼번에 무너지기 마련이다.”(41면)
흥미로운 점은 가족관계에서 겉돌던, 말하자면 가장자리의 10번 핀 같던 『탬버린』에서의 여자들이 『돌보는 마음』에 이르면 열개의 볼링 핀 중심에 서 있는 ‘킹 핀’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표제작 「돌보는 마음」에서 미연은 출산 후 복직을 앞두고 베이비시터를 알아보는 중이다. 낮에는 시터의 도움을 받고, 퇴근 후에는 남편과 육아를 분담하면 얼추 일과 가정 모두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미연의 일상을 따라가보면 시터를 구하고 생활의 방식을 조율하며 시터가 일할 수 있도록 집 안의 여건을 마련해놓는 일이 전적으로 미연에게 전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아내의 일’로 인식됨에 따라 타인에게 아이를 맡기면서 발생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문제의 책임 또한 오롯이 미연에게 부과된다. 그러니 남편은 시터에 대해 “지엽적인 문제는 덮고 총체적인 퍼포먼스로 평가”(165면)하는 너그러운 사람일 수 있지만, 미연은 예민하고 별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미연은 가족의 생활을 관장하는 핵심적 자리에서 돌봄노동의 구매를 비롯해 가정의 재생산 시스템 전반을 관리·운영하고, 부족한 부분은 스스로 수행한다. 그러니까 ‘핀 캐리’의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자들이 이제 킹 핀, 아니 ‘퀸 핀’이 되어 가족들을 돌보느라 ‘하드 캐리’(hard carry)1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의 ‘핀 캐리’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여자들이 도리어 가족을 위해 ‘하드 캐리’하는 장면은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는 그녀들이 가족 내부의 차별구조와 재생산 시스템을 경험적으로 습득한 결과일 것이다. 가족제도 내에서 여성은 가정 경제가 휘청거리거나 구성원이 아플 때 가족의 운명에 가장 단단하게 붙들리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그러한 파국을 막기 위해 가족 전체의 안녕을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는 역할에 구속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니 그녀들이 가족이라는 굴레 속에서 선택하는 최선은 조금 멀리서 지켜보면 늘 ‘덜 나쁜 쪽’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은 두가지 나쁜 선택지 중에 ‘차악’을 골라야 하는 밸런스게임을 연상하게 한다. ‘핀 캐리’라는 가족의 공동운명에 종속되거나, 그렇지 않으면(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족 전체를 지탱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쏟아붓는 ‘하드 캐리’를 하거나. 그녀들은 거대한 가부장제 가족제도의 구속 아래에서 ‘최선을 다해서’ ‘덜 나쁜 쪽’을 선택하고 ‘덜 나쁘게’ 살아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밸런스게임의 플레이어들이다.
여자들의 삶이 밸런스게임의 연속이라는 건 가족제도에 편입되느냐 마느냐 같은 거창한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당장 미연에게는 베이비시터를 구하는 일도 그렇다. 일단 아무리 완벽한 시터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이는 엄마가 직접 돌보아야 한다’는 모성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한 시터 구인 자체가 최선의 선택일 수 없다. 여기에 여러 현실적 조건이 겹치면 ‘덜 나쁜’ 선택지들이 남는다.
한편, 가정 경영과 관련하여 한국사회의 현실이 강하게 반영된 소설이 「내 이웃과의 거리」다. ‘정윤’과 ‘혜미’는 같은 해 태어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공통점 하나로 지나치리만큼 붙어 다니지만, 삶의 방식이 꽤 다르다. 정윤이 내 집 마련과 같은 장기 계획보다 당장의 여유를 추구한다면, 혜미는 무리하게 집을 장만한 뒤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둘의 만남에서 정윤이 소소한 지출을 부담하는 대신 손끝이 야문 혜미가 이리저리 정윤을 챙겨주면서 둘은 꽤 잘 지냈지만, ‘하우스푸어’라는 혜미네의 집값이 크게 뛰었다는 소식을 정윤이 알게 되며 관계는 파탄 난다. 궁상맞다고 생각했던 혜미가 실은 자신보다 훨씬 부자라는 사실에 약이 오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사실이 정윤에게 “벼락 거지”(208면)가 된 듯한 박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말부의 정윤과 혜미의 소행은 웃음을 터뜨리게 하지만, 그뒤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이들의 치사한 신경전이 남의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궁상맞은 하우스푸어가 되거나 약삭빠르지 못해 벼락 거지가 되거나. 이는 곧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닌가.
소설에서 밸런스게임 같은 딜레마가 읽혔다면, 우리 세계가 그렇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차악과 최악 사이에서 고민하느라 다른 삶을 상상하기 어려워진 것 같아요. 가령 「돌보는 마음」의 미연이 만난 베이비시터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일을 하다보면 비누 한장 가져갈 수 있고, 아이에게 웃어주지 못할 수 있어요. 혹은 남의 아이를 봐주면서도 막상 자신의 시어머니에겐 잘 못할 수도 있고요. 그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머리로는 수긍이 가면서도 아이를 맡기려고 하면 그런 것들이 마음에 걸리게 되죠. 미연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선택을 하지만,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주지는 못해요. 이렇게 제 소설에는 최선을 다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저는 그 선택의 정당성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안(安)」의 주인공 ‘윤미’는 끝내 이혼을 하고 나서도 쉽게 편안해지지는 않는 인물이죠. 결말이 불만스럽다는 독자 반응을 본 적도 있어요. 이혼을 했는데도 행복해지지 않은 게 찝찝했던 거예요. 하지만 윤미에게 이혼은 그때 그 시점에서의 최선이었던 것뿐이죠.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있지만 당장 숨통을 틔워야만 했고요. 이혼이 잘한 결정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선택의 결과를 열어두고 싶었고, 소설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건 오히려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어요. 결과는 모르는 일이고 그때의 선택은 그때의 최선인 것이죠.
중단 없는 생활과 유보되는 판단
「안」은 가부장제 가족관계 그 자체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만큼 관계의 모순성을 입체적으로 탐구한 소설이다. 우선 서술자 ‘나’(윤미)는 엄마의 딸이자 큰엄마의 조카딸, 공씨네 집의 며느리, 동시에 시누이자 올케인데, 이러한 ‘나’의 복수적 위치는 가족을 보는 입체적 시각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 우선 ‘나’에겐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엄마가 있다. 큰엄마는 대가족을 먹이고 입히느라 평생 고생만 했지만, 그걸 여자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반면 엄마는 아빠를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진 실질적 가장이었으며, ‘나’에게 여자라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가르쳤다. 두 엄마의 애정은 정반대편에 있는 듯하지만, 실은 ‘여자라서’라는 전제를 공유한다. 여자라서 가족을 보살펴야 하거나, 아니면 여자라서 능력이 있어야 하거나. ‘나’는 이러한 잔소리가 두 엄마 나름의 애정이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여기에 시어머니가 끼어들면서부터 관계는 한층 입체적이게 된다. 시어머니는 자식들과 식사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며, ‘나’의 부부를 주말마다 부른다. 숨 막히는 결혼생활 속에서 ‘나’가 떠올린 건 “큰집에 갈 때마다 1분도 더 머물기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이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야 엄마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하게 됐다.” 문제가 간단치 않은 건, 그렇게 서둘러 떠나던 “엄마의 뒷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큰엄마의 표정과 눈빛도 눈에 아른거린”(42면)다는 거다. ‘나’의 유년이 외롭지 않게 살뜰한 사랑을 주었던 큰엄마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시어머니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 반대로 엄마는 주말마다 친정에 아이를 데려와 설거지 한번을 안 하는 ‘나’의 시누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시댁에 냉랭한 새언니를 이해할 법도 한데, 그건 또 아닌 듯하다. ‘나’는 큰엄마의 부고를 받자마자 새언니에게 전화를 해 병세가 어땠는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언제였는지 추궁하듯 묻는다. 또 새언니가 큰엄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지 않다고 서운한 마음을 품는가 하면, 의도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새언니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만다. 심지어 장례식장에서 새언니에게 큰엄마는 “워낙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분이시라” “다른 시어머니들에 비해 시집살이 안 시킨 편 아니”(61면)냐고 되묻기도 한다. 물론 이걸 가지고 따진다면 ‘나’는 악의 없는 말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시어머니의 말도 ‘악의’는 없는 게 아닐까. “힘들면 여기 와서 쉬면 되지. 내가 밥도 다 해 주는데 힘들 게 뭐가 있니?”(45면)
소설을 쓸 때 ‘누구 하나를 나쁘게만 그리지는 말자’라는 다짐을 하곤 해요. 특히 「안」의 큰엄마처럼 가부장제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도 스스로 그 규범을 내면화하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어떤 시각에선 그들을 비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삶은 옳다 그르다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식이 아니지 않나 싶어요. 삶은 복잡하니까 소설에서 사람들을 덮어놓고 판단하거나 나쁘게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인물들이 살아온 삶을 펼쳐놓고 보고 싶었고, 그 맥락을 생각하고 각자의 마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나 들여다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게 펼쳐서 보면 가부장제라는 관계 안에 들어왔을 때 서로의 입장과 역할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큰엄마도 ‘나’에겐 너무나 좋은 사람이지만, 새언니 입장에선 피곤한 시어머니일 거예요. 엄마도 ‘나’에겐 가모장이지만 큰엄마 입장에선 꼴 보기 싫은 동서일 것이고요. 다른 관계로 만났으면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에요. 관계가 설정되고 역할을 맡으면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나쁜 사람이 되는 역학이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고 생각해요.
김유담은 인물 각각에 선악의 판단을 내리는 대신 그들을 그 자리에 배치하는 구조에 관심을 두었다고 말한다. 「안」의 주인공이 가부장제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것도 소설 속 갈등이 인물의 성격이나 행위에서 기인하기보다 가족제도가 여자들을 분할하는 방식 자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큰엄마의 돌봄은 ‘나’를 사랑에 굶주리지 않게 해주었지만, 바로 그 사랑 때문에 그의 며느리나 동서는 숨이 막혔다. 여자들이 각자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존중받을 수 있었다면 누군가의 사랑을 구속과 부담으로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사랑의 진위가 아니라 그 사랑을 의무로 둔갑시키는 구조에 있는 것이다. 곧, 여자들은 의무를 부과하는 가족제도 속에 놓이는 순간 서로에게 악역이 된다.
사람들을 특정 역할로 환원하고 갈등 속에 배치하는 구조를 살필 때 발견되는 또다른 차원은 ‘부의 대물림’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대물림되는 부는 가부장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 없으면 결혼하기도 집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잖아요. 각자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힘든 시대이기 때문에요. 그러면 재력을 가진 부모에게 더 종속되는 거예요. 가령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는 주말마다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와서 주차장 자리가 없다더라 하는 얘기도 들려요. 성실히 일하고 알뜰하게 모은다고 해서 잘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니까, 어떤 젊은 세대는 세습을 원하기도 하는 거죠. 한쪽에서는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부의 대물림과 함께 가부장제가 계속 공고해지는 움직임도 있다고 봐요.
지금 부모님 사시는 잠실 아파트도 결국 나중에 누구 거 될 거 같아? 그거 앞으로 재개발되면 시세 차익이 엄청날 텐데 누나 주실 거 같아? 절대 아닐걸. 나는 나중에 우리가 잠실 들어가 살고, 지금 우리 사는 집으로 재테크 잘해서 그거 다 우리 아이에게 물려줄 생각이야. 우리 부모님처럼.(「안」 48면)
남편 ‘공’은 지금 부모가 살고 있는 잠실 아파트가 훗날 자신들의 것이 되고, 더 훗날에는 자식들의 것이 될 거라며 주말마다 ‘그 아파트’에 함께 가자고 설득한다. ‘나’는 시부모에 대한 ‘감정노동’이 아파트로 환산되는 것인지, 아파트값을 다하려면 얼마만큼의 노동이 필요한지, 결혼이 그렇게 정량적으로 계산되는 것인지 따져 묻고 싶지만, 세상은 이미 그런 계산법을 암묵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집살이를 토로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당당함을 시가로부터 받은 게 없다는 사실로 증명하려 했고, 시누의 타박에 마음이 상한 올케는 ‘나’의 시가의 재력을 부러워하며 “그런 시댁이면 문지방이 닳도록”(61~62면) 드나들 수 있다고 비꼰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공이나 새언니가 나쁘게만 그려지진 않는다. 공이 아내와 주말에 본가에 가는 것은 함께 여유있는 삶을 누리고자 하는 나름의 방법으로도 읽히고, 새언니의 화법 또한 시누-올케 관계를 같은 며느리의 입장으로 불러오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물론 생활의 고단함과 상대적 박탈감이 더해져 곱지 않은 말로 나왔지만 말이다. 이렇듯 갈등을 살피는 김유담의 시선은 각 인물의 심성보다는 이들이 고약한 말을 내뱉게 만드는 구조에 더 오래 머문다. 가부장제 역할극의 부조리와 함께 김유담이 발견한 것은 부의 대물림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며 작동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다.
노년 여성의 삼중고와 코로나19
『돌보는 마음』에는 노년으로 접어드는 여성들에 대한 관심도 묻어난다. 「입원」은 치매 증세를 보이는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는 ‘분례’의 이야기고, 「태풍주의보」는 ‘졸혼’을 준비하는 ‘희숙’과 뒤늦게 결혼을 한 희숙의 시누 ‘명주’의 이야기다. 사실 이들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노년’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이른 사람들이다. 여기에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욕망을 지닐 것이라 상상해서도 안 된다. 가령 오십대 중반의 희숙은 남편과 헤어져 독립된 삶을 꿈꾸고, 반대로 쉰에 접어든 명주는 ‘남들처럼’ 살아보려는 듯 결혼을 했다. 이들에게 오십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시기이며, 그 새로운 삶이란 정반대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한편 분례의 경우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는 게 영 못마땅하다. 젊어서 꽤나 속을 썩인 남편을 옆에 두고 오래 복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복수라고 했지만, 사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복수였다. 분례는 대수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세끼 밥을 정성스럽게 차렸고, 한여름에는 모시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림질한 옷을 대수에게 입혔다.”(221면) 아마 분례에겐 남편이 자신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복수였을 것이다.
오륙십대 여성의 욕망을 다층적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태풍주의보」에서처럼, 졸혼을 원하기도 하고 반대로 새로운 로맨스를 꿈꾸기도 하는 존재로요. 희숙 하나를 내세워서 졸혼 혹은 탈혼하는 이야기로 그리면 그 나잇대 여성의 욕망을 너무 단순화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었어요. 그래서 대칭적인 인물인 명주를 세웠고요. 소설에서 둘은 다섯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살아온 내력에 따라 전혀 다른 걸 원하는 거죠. 또 오륙십대 여성들이 돌봄노동에 가장 내몰린 사람들이라 해도 어떤 면에서는 「입원」의 분례처럼 돌봄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을 거예요. 돌봄을 일종의 권력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거죠. 앞서 얘기했듯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보다 이런 마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특별재난지역」은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했던 청도를 배경 삼아, 감염병 위기로 돌봄노동이 더욱 가중되었던 노년 여성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일남’은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 같이 사는 남편, 그리고 아들이 맡기고 간 손녀까지 먹이고 입혀야 한다. 여기에 팬데믹까지 덮치는 바람에 남편의 가게는 문을 닫고, 손녀의 학교는 개학을 미루었다. 일남은 남편과 손녀 식성에 맞추어 세끼를 챙겨주는 데 지치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서울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아들을 걱정한다. 또 손녀를 젊은 엄마들처럼 챙겨줄 수 없어 속이 상하기도 한다. 가족에게 정성을 쏟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몸이 따라주지 않고, 반대로 몸이 힘에 부치는데도 가족을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일남의 모습은 오늘날 노년 여성이 처한 곤경을 잘 보여준다. 덧붙여 팬데믹 한가운데서 쓰인 이 소설은 재난에 대한 문학적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돌봄의 노동과 마음
돌보는 마음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음 같아요. 제가 소설 속에서 돌봄의 힘듦을 주로 그렸지만, 내가 아닌 타자를 살피고 돌보는 마음은 인간이 건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기도 하거든요. 저는 돌보는 마음이 구조적 악습이나 역학 때문에 누추한 마음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돌봄노동에 관한 논의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아이를 기르고, 가족의 생활을 살피고, 아픈 가족을 간병하며, 부모를 봉양하는 일. 이런 일은 누군가의 주의와 노동력을 계속해서 필요로 하지만 노동이라고 인식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의 사랑’이나 ‘아내의 내조’처럼 여성에게만 의무를 부과하는 차별적 성별 규범과 가족 이데올로기는 돌봄을 가족 내부의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면서도 여성의 노동을 효과적으로 비가시화했다. 그런 맥락에서 집 안의 크고 작은 일에 ‘노동’이라는 말을 하나하나 붙여주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돌봄에 노동이 투여된다고 해서 돌봄이 곧 노동으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성장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누구나 죽음 앞에서 돌봄을 필요로 하게 돼요. 살아가는 과정에서 돌봄은 필요하고 귀중한 것이죠.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돌봄으로써 느끼는 기쁨이나, 돌봄을 욕망하는 마음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밸런스게임의 한 선택이나 폭탄돌리기처럼 서로 미루는 게 아닌 모습의 돌봄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연주의 절반」을 썼어요. 연주는 육아의 고통을 알면서도 기꺼이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하거든요. 대신 결혼이나 시댁의 구속 없이요. 소설에서 연주는 어느정도 돈도 있고, 능력도 있으며, 육아의 경험도 있어요. 이러한 설정은 누구나 연주가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여기게끔 안전장치를 둔 것이기도 해요. 얼마 전 연주처럼 아이를 얻은 한 여자 연예인에게 쏟아진 비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연주의 절반」의 ‘연주’는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삶의 많은 부분에 변화를 겪는다. 남편과 이혼했고, 시가뿐 아니라 친정 식구들로부터도 독립했다. 완벽한 화장에다 킬힐을 신은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고, 맨얼굴과 운동복 차림으로 산책을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구속을 벗어난 뒤 연주는 다시 아이를 갖고 싶어한다. 연주는 정자은행에서 공여받은 정자로 임신을 하고 비혼 싱글맘의 삶을 준비하게 된다. 아이에 대한 연주의 그리움은 자신의 죽은 아이에 대한 것이기도 할 테지만, 사랑과 보살핌을 주면 그로 인해 자라나는 아이라는 존재, 그리고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김유담은 연주에게 재력과 능력, 그리고 육아의 경험을 두루 갖추게 하면서까지 그녀를 통해 다른 돌봄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때 다른 삶이란 연주의 새로운 가족 형태에서 비롯될 것이며, 다른 돌봄이란 의무나 노동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돌봄의 ‘마음’까지 포함한 것일 테다. 여전히 돌봄노동은 여성에게 차별적으로 부과되는 의무이고, 돌봄노동이 의무로 부여되는 과정에서 마음을 보살필 여유는 박탈되고 있다. 그렇기에 연주는 가족제도의 구속을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돌보는 마음, 돌보는 관계에 대한 연주의 그리움은 우리에게 돌봄의 노동뿐 아니라 돌보는 ‘마음’까지 새삼 생각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또한 돌봄노동의 곤경과 함께 김유담이 소중하게 기록하고자 했던 ‘퀸 핀의 마음’의 한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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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으로 하는 게임에서 실력이나 역량이 월등한 플레이어가 팀을 승리로 이끈다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해, 특별히 애쓰거나 활약하는 경우를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