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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알레호 까르뻰띠에르 『잃어버린 발자취』, 창비 2022
바로크로 빚어진 경이로운 현실
송상기
宋相琦/고려대 서어서문학과 교수 sangkee66@gmail.com
꾸바 작가 알레호 까르뻰띠에르(Alejo Carpentier)는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이 밝혔듯이 보르헤스(J. L. Borges)나 네루다(P. Neruda)와 더불어 20세기에 중남미문학의 토대를 일군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까르뻰띠에르만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는 빠리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후 중남미의 총체적 현실을 형상화하는 데 천착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미학을 그려낸 작가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총체성은 서구와 비서구 세계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비전을 의미한다. 까르뻰띠에르는 서구와 비서구 세계의 중간자적 입장에 서 있는 매개자로서 새로운 글쓰기의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열망은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보르헤스와는 달리 신대륙 고유의 미학적 기원과 표현양식 문제에 천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초기에는 꾸바 흑인음악의 기원을 민속음악가의 입장에서 추적하다가, 베네수엘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의 신비와 원시의 주술이 근대세계 속에 공존하는 ‘경이로운 현실’(lo real maravilloso)을 주목하고 막스 베버가 근대의 특징으로 주목했던 탈주술화 과정을 역행하는 탐구 속에서 서구와는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미학을 찾고자 했다. 1960년대 세계문학계에 급부상한 ‘라틴아메리카 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까르뻰띠에르는 중남미문학의 미학을 ‘경이로운 현실’과 ‘바로크’로 규정지으며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구현해 중남미소설의 토대를 이뤘다.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발자취』(Los pasos perdidos, 1953)가 올해 출간된 것은 작품과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고려할 때 뒤늦은 감이 있지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개가 늦어진 이유 중에는 바로크 특유의 수사적 기재와 시적 표현이 만연체 문장 속에 빼곡해 번역이 수월치 않다는 점도 있는데, 역자 황수현은 이를 충실하고도 유려하게 전사하고 있어 향후 까르뻰띠에르 문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리라 확신한다.
‘잃어버린 발자취’라는 제목은 앙드레 브르똥(André Breton)의 시구에서 연원되지만 초현실주의적 상상을 바탕으로 하진 않는다. 세련되었으나 쇠락해가는 서구문명의 탈출구로 제시되는 남미의 대자연 속에서 존재와 예술의 근원을 느끼는 경이로운 현실을 서사화하며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적 위계관계를 해체시키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우선 뉴욕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산업도시에서 영화음악을 제작하는 화자와, 연극작품이 성공하면서 매일 밤 무대에 서야만 하는 그의 아내 루스 그리고 아내의 부재 속에서 화자에게 잃어버린 밤의 정염을 채워주는 초현실주의 시인 무슈가 등장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연극배우인 아내만큼이나 점성술을 믿고 불어를 쓰는 등 아방가르드하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무슈 또한 근대적 생활양식에서 벗어나기 힘든 인물이다. 화자는 서양예술의 토양 속에서, 현대적 삶에 대한 염증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갈 따름이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를 주제로 작곡을 시도하다가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화자는 어느날 원시 악기를 찾아 베네수엘라로 떠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도착한 마을은 ‘산타 모니카’라는 이름으로, 문명의 법칙이 아닌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는, 인류역사의 흐름으로부터 유리된 신세계주의의 결정체라 할 만한 곳이다. 화자는 이 원시적 이상향에서 라틴아메리카의 건강한 혼혈을 상징하는 로사리오의 신비한 매력에 이끌려 사랑을 나눈다. 새 소리와 벌레 소리, 원주민들의 타악기 소리가 거대한 심포니를 이루는 이곳에서 화자는 악상을 떠올리지만 종이가 떨어지고, 아내의 뜻에 따라 문명의 세계로 돌아간다. 아내와 긴 소송 끝에 결국 이혼한 화자는 로사리오의 품속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산타 모니카로 향하나 우기로 길이 잠긴데다 로사리오의 동거 소식을 듣고는 귀환을 포기하고 만다. 결국 화자는 끝내 자신이 원하던 곡을 쓰지 못하고 원시세계에서의 경험이라는 소중한 자취는 자서전적 소설로 남겨진다.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띤 까닭에 이 소설에서 화자는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 주관적 자아와 객관화된 자아로 분열되어 표현된다. 이 1인칭의 글쓰기는 자신을 객관화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서 3인칭과 혼동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거기에 원시적 순수를 갈망하는 자아, 근대적 작가로서의 창조적 욕망을 지닌 자아, 문명의 때를 벗지 못하는 자아가 중첩되며 그가 만나는 세명의 여인들에 그러한 자아들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여기에서 산타 모니카라는 이상향의 이름이 『고백록』의 저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이름이라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분열된 자아는 모성적 여인의 이미지 속에서 통합된 자아의 실현을 꿈꾸나 어느 누구에게도 안착하지 못하고 결국 자서전적 글쓰기만이 그러한 욕망의 여과물로 남는 것이다. 문명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화자는 동시적인 기표의 충만함을 안겨주는 곡을 남기지 못한 채 자서전적 글쓰기를 통해서 재영토화된다. 문명과 원시, 인위적 예술과 즉물적 예술은 이러한 혼성의 바로크적 글쓰기를 통해서 중재된다. 즉물적 예술의 단초라 할 음악의 기원에 대한 화자의 생각이 달라지는 대목도 흥미롭다. 화자는 산타 모니카에서 심령사가 환자를 치료하며 내뱉은 탄성을 듣고는 음악의 기원이 단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주체 간의 격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술적 탄성임을 깨닫는다. 원초적 예술이 지니는 주술적 측면이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기독교적 상징과 알레고리로 대체되었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추상적 형식으로 대체되었는데, 주인공-화자는 오늘날 잃어버린 예술의 주술적 측면을 재발견한 것이다. 바로크 예술은 상징화된 표현양식에 인간 본연의 열정과 코드화되기 이전의 현실, 코드화된 기호들을 중첩하여 표현하는데, 이 작품은 자연을 코드화하는 과정에서의 긴장감을 우리 앞에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이를 통해 선사/역사, 자연/문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재맥락화되고 해체된다. 가령 산타 모니카를 세운 선지자는,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은 땅에서 그러했듯이 처음 보는 사물에 대한 이름 짓기 등 기호체계를 확립하고, 규율을 만들어 원주민들을 통치한다. 자연과 그를 상징하는 여인인 로사리오에 대한 주인공의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적인 갈망과 염원 또한 결국엔 새롭게 구성된 가부장적 지배체제에 갇힌 산타 모니카와 로사리오의 표피만을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까르뻰띠에르는 자신의 기원에 대한 추구의 일환으로 행한 글쓰기적 실험의 여정을 통해서 중남미문학 전반에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안겨주었다. 『잃어버린 발자취』는 ‘미래의 기억’을 머금은 유토피아를 언어의 혁명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가르시아 마르께스(G. García Márquez)의 『백년의 고독』(1967)에 영향을 준 선구적인 작품이며, 문명과 원시라는 이분법을 깨고 원시림이 가득한 오지에 새롭게 문명을 정초하며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예리하고 유연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콘래드(J. Conrad)의 『암흑의 핵심』(1899)에 비견되는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