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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함명춘 咸明春
1966년 강원 춘천 출생.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가 있음. 0505hmc@hanmail.net
雪國
비행기는 아주 낮게 날고 있었다
그때 하늘의 문빗장이 풀린 듯 눈이 쏟아지고
기체가 몇번 기울더니 굉음이 이어졌다
난 그만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한마리 사슴이 되어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었다
한쪽 발목은 부러지고 화살도 한 두어방 맞은.
얼마큼 쫓겼을까 깊은 산속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었다
피가 나오는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하루 세끼 식사가 꼬박꼬박 나왔고
간식으로 지천에 깔린 적막을 꺾어 먹으면 되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질리지 않았다
나를 쫓던 사냥꾼은 나를 찾지 못하고 떠났다
내가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세상으로 놓인 길을 다 지우고 있었다
책임도 기억도 내가 있는 줄 모르고 지나가고 있었다
온천에 앉아 찻잎처럼 오그라들었던 몸이
하나둘 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난간을 꽉 잡았다
천천히 상처에 새살이 돋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며칠, 나를 구해준 사람이 집을 비운 사이
눈에 파묻혔던 길들이 팔뚝에 힘줄을 새기며 떠올랐다
그 길로 사냥꾼이 풀어놓은 사냥개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나를 잊었던 시간도 컹컹 짖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를 쫓던 사냥꾼이 나를 찾아낸 것이다
사냥꾼에게 포획된 난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꼼짝할 수 없었고
아물었던 상처엔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 난 그만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비행기는 아주 낮게 날고 있었다
천천히 한점 눈조차 발 디딜 틈이 없는
철근콘크리트 기둥들로 빼곡한 도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눈이 젖고 있었다
뒤꼍나무
사철 푸른 황소가 있었어 너무 오래 박혀
뿌리가 되어버린 말뚝에 단단히 묶여 있는
날마다 말뚝이 흔들릴 정도로 구름 둔덕 너머를 향해
머리를 내저으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내딛곤 해
난 그의 고향이 별일 거라 생각했지
딱히 이름을 몰라 뒤꼍나무로 부르다
뒤꼍나무가 되어버린 나무 훗날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옹이처럼 굳어져버린 나무
저녁이 어디선가 지고 온 노을 한짐을
서쪽 하늘에 풀어놓으면 난 잠시 걸음을 멈춘
그의 등에 걸터앉아 노을로 성(城)을 쌓곤 했어
그곳에선 늘 반뼘씩 어긋나 있던 세상과
바람 간의 불화와 다툼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저녁밥을 먹으라고 어머니가 나를 부르면
그의 입 속으로라도 들어가 꼭꼭 숨고만 싶었지
그렇게 있다 보면 언젠가 말뚝을 뽑고 뒷담을 넘는
황소 등 타고 별에 가닿을 거라 꿈꾸며
어느 날 도로구획 정비로 쫓겨난 우린 가족은
판자조각같이 떠밀려갔어 가까스로 닿은 곳은
자동차가 달리는 도시였는데 내 손엔 장미가 그려진
책가방이 들려 있었고 난 학교를 가고 있었지
영혼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시계불알처럼
중학교를 배정받았을 무렵이었던가 아버지와 우연히
그곳을 지났을 때 몇개의 대들보 자국만 남아 있었지만
난 뚝뚝 끊어져 있는 저 띠구름이
황소가 하늘에 오를 때 찍힌 발자국이라 믿으며
셀 수 없이 떠 있는 저 별 어딘가에서
노닐고 있을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지
동네 어귀 들어서면 우리 집을 송아지같이 품고 있던
사철 푸른 황소가 있었어 그의 품속에선
며칠째 비 맞은 참새떼가 옹기종기 모였다 가고
어떤 날은 풀 한포기 나지 않는 서너평 남짓한
허공을 일궈 씨알이 굵은 고요를 길러내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