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씨 『라듐 걸스』, 이숲 2022
미지의 기술이 성공의 역사가 되려면
김연화 金演華
과학기술학 연구자 yeonwha@gmail.com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기여를 하지만 역사는 이 중 일부만을 선택하고 기억한다. 과학의 역사도 다르지 않아서 기술의 발전에 관여한 많은 사람들이 지워졌다. 1940년대 미국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인간 컴퓨터’라 불리며 로켓의 정확한 속도를 계산해 우주 탐사에 기여했으나 최근에야 알려진 ‘로켓 걸스’처럼 말이다. 라듐 걸스는 로켓 걸스처럼 직접적으로 과학기술의 연구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사회에 기여한 여성들이다. 평자를 비롯한 한국 독자들에겐 낯설겠으나 미국 내에서는 몇년 전부터 이들의 이야기가 도서와 드라마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얼핏 걸그룹 이름 같기도 한 라듐 걸스는 1920년대 미국 뉴저지의 시계공장에서 라듐이 섞인 야광 도료를 시계판에 칠하다 방사능에 피폭된 여성 노동자들을 말한다. 1989년 퀴리 부부가 발견한 라듐은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라듐이 내뿜는 초록색 빛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는데, 미국에서는 라듐이 함유된 ‘언다크’라는 페인트를 개발하여 야광 시계를 제조했다. 시계판의 가느다란 숫자에 야광 도표를 빠르고 세밀하게 바르기 위해 붓 끝을 입술로 다듬어 작업하던 노동자들은 이후 치통을 시작으로 턱의 괴사, 잦은 골절을 경험했다. 같은 증상을 앓는 친구들과 하나씩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그레이스 프라이어를 비롯한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10년이 넘는 긴 법정 공방 끝에 1939년 승소했다. 그들의 소송은 미국 노동법의 개정으로 이어져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당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방사능의 위험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제 사건에는 과학과 정치가 얽힌 복잡한 맥락이 있지만, 프랑스 그림작가 씨(Cy)는 그런 것들은 뒤로하고 여섯 여성이 시계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해서 소송을 제기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래픽노블 『라듐 걸스』(Radium Girls, 2020, 김모 옮김)에서 비교적 단순하고 간결하게 풀어간다. 스토리만 따라가면 금세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씨가 세심하게 설정한 프레임과 장면 배치가 빠르게 넘어가는 시선을 붙잡고 생각의 여백을 채워주며,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는 신문 기사, 해변에 온 장애인과 같이 스치듯 언급되는 장면들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작가는 보라색과 초록색 두개 톤만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면서도 인물들의 밝음과 어두움을 단조롭지 않게 보여준다. 초반부 밝은 보랏빛 배경 속에서 빛나는 초록색 물결은 그들의 미소를 더욱 환하게 만들어준다. 그도 그럴 것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광고와 건물 벽에 붙은 광고판에는 라듐을 찬양하는 이야기뿐이다. “건강과 활력을 되찾”(6면)게 해주는 음료부터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78면) 지워주는 크림, 빛나는 니트까지 라듐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고가의 라듐 페인트를 마음껏 만지고 필요에 따라 쓸 수도 있다니 꽤 괜찮은 직업이지 않은가. 하지만 보안경에 장갑, 납 앞치마까지 안전장비를 갖추고 라듐을 다루는 (남성) 연구자들과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페인트 작업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대비 속에서 그들은 원인 모를 신체적 고통을 겪으며 변해간다.
씻어도 온몸에 남아 있는 초록빛. 그것이 유령처럼 보이는 까닭에 급기야 한밤중 집 안에서 마주친 가족은 놀라 기절한다. 어두운 영화관에서도 원치 않게 밝은 빛을 내던 그들이 보고 있던 영화가 마침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점도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지식으로 창조된 피조물은 흉측한 모습에 돌봄을 받지 못하고 괴물이라 손가락질받지만, 오히려 괴물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책임을 다하지 않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였다. 그렇다면 자신들은 보호장치를 갖추고 실험을 하면서 노동자들에게는 안전하다는 말로 속인 라듐 제조회사의 관계자들이 괴물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 대해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그들도 라듐의 위험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부나, 그 이전 우라늄을 발견한 베크렐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라듐을 건강음료라고 마시며 라듐 도료가 묻은 붓을 입으로 빨던 이들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실제 라듐이 발견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암 치료에 효능이 있음이 입증되었던 탓에 라듐은 건강을 위한 신비의 명약으로 각광받았다. 아직 과학이 무지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시절에서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초를 다투며 기술이 개발되고, 신기술이 탑재된 신제품이 팔리고 사용된다. 우리는 기술의 위험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코로나19 백신처럼 팬데믹이라는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향후 나타날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장애를 남긴 가습기 살균제의 경우 초기에는 적은 양은 괜찮다고 분류되었으나, 가습기에 의해 분사되면 폐에 치명적이라는 것이 뒤늦게 연구되었다. 고압 송전탑, 녹조류가 발생한 물에서 자란 벼, 풍력 발전기 등 위험성 논란이 있는 기술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와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개인의 선택에 따라 사용을 피하거나 위험을 감수하거나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니 괜찮을 거라고 믿는 것뿐이다. “위험한 일이면 여태 이렇게 했겠어?”(48면)라고 말하는 라듐 제조공장의 노동자처럼.
그렇다고 우리 스스로 사전에 모든 위험성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술을 만들어낸 과학이, 기술을 파는 산업이, 기술을 공공에 적용하는 정부가 최대한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위험성을 연구하고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 과정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사회의 속도를 조금 늦출 필요가 있다. 작업을 빠르게 하기 위해 붓 끝을 입술로 다듬거나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채로 반도체 공정 작업에 투입되지 않도록 말이다. 과학이 기술의 어둠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연구할 시간 또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씨가 여섯 노동자를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씨의 그림 속 그들은 무지한 어린 소녀도, 단지 방사능의 희생양도, 여성운동의 전사도 아니다. 그저 “월급도 많고 회사도 멋지고, 사촌들이 부러워서 난리”(18면)인 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직업을 갖고 있기 위해 일을 하는 평범한 젊은 여성들이다. 휴식시간에는 수다를 떨고 퇴근 후에는 함께 클럽이나 해변으로 놀러 다니며 친구의 비밀을 알고 몰래 키득대기도 한다. 손이 느린 동료를 위해 잔업을 나누어 맡기도 하지만 가끔 다투기도 하는 친구들이다. 씨는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라듐 걸스』를 그렸다고 말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지워진 이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편의에 따라 한 면만을 부각하며 납작하게 그려내거나 자극적인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살아간 ‘사람’으로 기억하기. 씨는 아마도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