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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해존 李海存
1970년 충남 공주 출생.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등이 있음. 311jon@hanmail.net
가시철망
집 앞 공터에 가시철망이 선인장처럼 박혀 있다
들킨 짐승처럼
아직 뜯어먹을 풀과 빗물 고인 빈 병들을 거느리고
침입자에게 사나운 송곳니를 드러낸다
지날 때마다 눈이 따갑다
울타리를 벗어난 짐승이 녹슬어간다
혓바닥을 빼어 물고 바람이 뱉어놓은 상처
공처럼 구르다 제 몸을 둘둘 말아 울타리 친다
스스로 제 가슴을 찌른다
위험할수록 안전한 보금자리
털이 달라붙은 가시철망과 담벼락 사이
벼려진 고양이 울음소리 날카롭다
펼쳐놓은 책 속으로, 잠 속으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뛰어다닌다
갈피마다 위태로운 활자가 박혀 있다
누구도 수거해가지 않는 무덤으로
버려진 길들이 모여든다
녹슨 둘레를 물고
축축한 땅속이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하지(夏至)
커튼에 남은 햇살과 방 안의 어둠 사이로
담배 연기가 길게 올라간다
식탁에 거울을 올려두고
물감을 찍어내듯
얼굴에서 거울을 떼어내 나를 그린다
닮지 않은 두 얼굴이 쳐다본다
두 손으로 그리다 만 얼굴을 쥐고
거울을 깨뜨리면
파편 속 진짜 얼굴이 솟아오를 것 같다
무표정한 표정이 무수한 나뭇잎처럼 범람한다
커튼 뒤에 숨어서 걸어 나올 것 같은 가로수
그 길어진 그림자가 바닥을 향해 제 몸을 꺾는다
그리다 만 얼굴이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숨과 숨이 합쳐지고
나뭇가지에 걸린 표정들이 바람에 출렁인다
거울 속 햇살이 날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