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무늬가 닳도록 다시 말한다는 것
임현 林賢
소설가.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 『그들의 이해관계』, 장편소설 『당신과 다른 나』 등이 있음.
dasimarvel@naver.com
기억에 대한 여러 비유들을 나는 좋아하는데, 그것이 그대로 내 직업과 관련하여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비유 중 하나는 동전으로, 오래 손을 탈수록 동전의 무늬가 닳아가듯이 기억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처음과는 다르게 점점 부정확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기억에 대한 표상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마치 각자의 머릿속에 책꽂이나 앨범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어서 원한다면 언제든 잘 보존된 서적이나 사진을 꺼내어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정확한 기억의 원본은 늘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그 기억의 관리자로서 책임을 지게 된다. 이를 방해하는 것은 망각이라는 왜곡뿐이다. 때문에 망각은 자연스럽게 기억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분실이나 훼손의 의미적 자질을 갖게 되며, 이로 인한 불안을 낳기도 한다.
‘잊지 않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참사 앞에 자주 언급되는 이 문장의 무게감을 생각할 때, 기억은 온전히 수호해야 할 가치이자 그럼에도 잃기 쉬운 소중한 덕목인 셈이다. 그러나 동전의 비유는 이와는 조금 다른 개념적 사고를 요구한다. 이때의 망각은 단순히 병리적 혹은 윤리적 결함에 의한 손실이라기보다는 어떤 기억을 마주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과정이자 절차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동일한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조금씩 새롭게 기억할 수밖에 없으며,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보다 정확히는 기억을 할수록 기억해야 할 대상에게 전에 없는 새로운 선과 색을 덧입히는 일에 가깝다. 따라서 이 경우 기억의 소유자에게 요구되는 책무는 엄정한 관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어떻게 ‘다시’ 기억할 것인지 맥락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문제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기억에 대한 상반된 두가지의 비유는 이야기를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는 바르뜨(R. Barthes)의 저술가(écrivant)와 작가(écrivain)의 구별을 염두에 둔 말인데, 전자가 ‘증언’을 목적으로 정확하게 기억하는 자라면, 후자는 그것을 어떻게 ‘다시’ 말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자이다. 이 둘은 우열의 관계에 있지 않으며 글쓰기의 주체로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빨치산의 딸』(초판 전3권, 실천문학사 1990, 복간판 전2권, 필맥 2005) 이후 32년 만에 정지아가 다시 쓴 ‘아버지’의 서사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는 그 선택의 간극과 변화를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나는 생각했다.
『빨치산의 딸』은 내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빨치산이나 90년 당시 변혁세력의 현실인식이 잘못된 측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충실하게 기록돼야 하고, 그렇다면 『빨치산의 딸』은 기록의 충실성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빨치산의 딸』 ‘복간판을 내며’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의 말’
‘역사의 기록’에서 ‘나의 반성’으로의 변화. 한 세대를 거치면서 아버지에 대한 정지아의 글쓰기에서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이지 않을까. 그러나 고백하자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빨치산의 딸’이 아닌 정지아를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책을 너무 다큐멘터리로 읽는 분들이 많아요.”
다른 중요한 말들도 많았으나, 인터뷰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나는 이 말만은 따로 언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나의 오해를 지적하는 말처럼 들렸고, 그날의 대화를 다시 복기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맥락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
굳이 공통점을 찾으려 든다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일화라고는 전혀 없었다. 세대와 성별이 달랐고, 이전에 다른 자리에서 만난 적도 없었다. 다만 정지아의 고향인 구례와 내가 나고 자란 순천은 지리상으로 매우 인접한 곳이었고, 최근엔 광주 소재의 서로 다른 대학 문예창작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서 어쩌면 오다가다 마주칠 만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고, 말하자면 정지아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몇해 전부터 정지아는 고향인 구례에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처음 인사를 나눈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인터뷰는 오후 세시에 진행되었는데, 그보다 앞서 서너개의 일정을 마치고 온 뒤라고 했다.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는 말에 “구례에도 KTX가 정차하나요?” 내가 놀라워하자, “구례 무시하시네?”라며 그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 가벼움이 나는 몹시 반가웠다.
제 고향은 어릴 때 호롱불을 켜고 사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70대들과 친해요. 70대의 정서가 저랑 잘 맞아요. 어릴 때는 그런 게 싫었는데.(웃음)
5학년 때 서울로 갔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친구들도 알고 있다는 걸 내가 알게 된 거죠. 어려서부터 나는 어른들한테 인정받는 걸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주변에서 ‘빨갱이의 딸’이라고 하니까…… 나를 아는 동네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형편이 못되는데도 엄마를 졸라서 서울로 올라간 거였죠. 그때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시위를 했는데 가난한 집안의 비애가 뭐냐면, 다른 집 같으면 문을 쾅 닫고 내 방으로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시절에는 내 방도 없었어요. 할 수 있는 게 단칸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밖에 없었죠. 고작 이불을 사이에 두고 밤새워 대치한 끝에 얻어낸 결과였어요. 그 시절에 이사에 쓸 돈이 어디 있겠어요. 세간살이도 별로 없고, 솜이불 한채, 부엌살림 정도만 챙겨 기차에 올랐어요. 그런데 당시에 시골 사람들은 서울 한번 간다 하면 뭘 그렇게 바리바리 들고 다녔는지 기차 안이 꽉 찼어요. 이불을 내 무릎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엄청 무거웠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무릎을 짓누르는데도 구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행복한 거예요. 구례는 내 고향이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곳이고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구례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정지아에게 구례는 오랜 세월 부모의 고향일 뿐이었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고, 무엇보다 사춘기 시절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빨치산의 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자, 이듬해 정지아 역시 다시 구례로 돌아가게 되었다. 곤두박질치던 성적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버지는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형편에 맞지 않는 유학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사치라고 꾸짖었다. 그나마 어머니는 가까운 구례여고가 아니라 대학 진학률이 높은 순천여고로 딸을 보냈다. 지리산 반내골의 첫 대학생이 된 정지아는 그제야 비로소 구례와 부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시기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었노라고 『빨치산의 딸』을 쓰던 무렵의 정지아는 고백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을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알게 되면서 나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카인의 표지가 부끄러운 것도 죄스러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가장 순결한 이름을 물려준 것이었다. 친일파의 딸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의 딸도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성이 봉건적 인습에 묶여 있을 때 떨쳐 일어나 빨치산이 되었던 어머니의 딸이었다. 나의 지리산, 내 이름처럼 나는 가장 깨끗하고 건강한 핏줄을 이어받은 민중의 딸이었다. (1권 63~64면)
1984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신입생이었던 정지아는 이전에 교과서로는 접하지 못했던 해방 전후의 역사를 대학에서 새롭게 배우게 된다. 그러나 빨치산의 딸로 자라온 그에게 아주 낯선 내용은 아니었다. 그의 사회의식이나 인식을 전환시킨 것도 아니었다. 대신 그가 이해하게 된 것은 부모의 이력이었다.
대학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 대부분 부모와 대립하게 되잖아요? 저는 오히려 부모와 사이가 좋아졌어요. 무엇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지음, 한길사 1979)을 한번 읽고 나니 내 부모에 대한 모든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분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게 된 셈이죠. 왜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이 가고, 저 시대에 내가 태어났다면 나라도 당연히 저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1988년 이태(李泰)의 『남부군(南部軍)』(두레)이 출간될 무렵,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이었던 아버지와 남부군 이현상(李鉉相) 부대의 정치지도원이었던 어머니를 찾았다고 했다. 구(舊) 빨치산 출신 부부의 활동 거점이었던 지리산과 백아산은 ‘지아’라는 딸아이의 이름을 짓는 데에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리고 빨치산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아버지는 ‘언젠가 내 딸 지아가 쓸 거다’라며 돌려보냈다고 했다.
저는 그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거든요. 저한테는 그런 말씀을 한 적도 없었고요. 소설가 송기원씨에게서 연락을 받고서야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빨치산의 딸’이라는 제목도 그분이 정해주셨어요. 그제서야 부모님이 더 늙기 전에, 기억력이 조금이라도 더 좋을 때 기록으로 남겨두는 게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몰랐던 얘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죠. 사실 누가 그렇게 부모의 삶의 이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을 수 있겠어요. 이후로 보통의 부모 자식 관계와는 조금 달라졌던 것 같아요. 한 존재로서의 부모님을 훨씬 가깝게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어요.
1989년 『실천문학』을 통해 연재된 후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된 『빨치산의 딸』은 한달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그사이 이미 10만부 가량이 시장에 유통된 뒤였다. 『빨치산의 딸』의 영향력이 어땠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지아는 황석영, 고은 등과 함께 2005년 7월 평양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참여했다.
아마 북한에서 읽힌 거의 유일한 남한 작가였을 거예요. 교재로 쓰였다고 했어요. 민족작가대회를 준비하면서 북측에서 저를 꼭 데려와야 된다고 그랬대요. 만찬장에서도 저를 북한 문인들이 보고 싶어한다며 다른 테이블에 있던 작가들이 데리러 오는 거예요. 내 것밖에 안 읽었을 테니까.
정지아는 『빨치산의 딸』을 이야기하며 자주 ‘실록’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역사의 정확한 기록이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포함한 용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단편소설 딱 세편 쓰고 졸업한 게 고작이었어요. 『빨치산의 딸』은 구성적 한계가 너무 뚜렷한 글이에요. 소설이라기보다는 ‘실록’이었거든요. 저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냥 썼을 뿐이에요. 거창한 것 같지만, 빨치산의 딸로 태어난 나의 역할이자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걸 문학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은데 자꾸 사람들이 문학작품으로 대하니까 좀 무섭더라고요. 내 문학이 거기에 갇히게 될까봐. 이를테면 다른 빨치산 어른들한테도 나는 그분들 딸이에요. 나는 그들을 대변해야만 하나? 이런 회의감도 들었어요. 빨치산의 딸이라는 정체성으로 나의 전부를 규정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까 하는 고민을 했고 이후로는 진짜 내 글을 쓰고 싶었어요. 『빨치산의 딸』을 다시 쓰고 싶진 않아요. 부모님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 쓰고 싶어요.
*
‘진짜 내 글’을 쓰고 싶었다던 정지아가 32년 만에 또 한번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백아산의 ‘아’와 지리산의 ‘리’를 딴 대학강사 ‘아리’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7면) 죽은 아버지의 사흘장을 배경으로, 혁명이라는 진지하고 무거운 단어조차 유쾌하게 풀어놓는다. 아버지를 다시 기억한다는 것은 정지아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빨치산의 딸이 아닌, 아버지의 딸로서 그는 무엇을 다시 쓰고 싶었던 걸까.
별것 아닌 기억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 혁명가가 아닌 순간의 아버지, 거기서 어린 내가 발견한 것은 뻔한 남자들과 다르지 않은 뻔한 행동이었다. (66면)
정지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2008년 5월 1일, 노동절의 일이었다. 그리고 정지아는 그날의 풍경들이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장례식 풍경이 되게 신기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어린 시절 친구들, 좌파 친구들, 어머니의 빨치산 동료의 딸 이런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에 등장하는 허구의 몰락한 참전 용사처럼 ‘빨갱이 새끼 죽었다고 국회의원 화환이 웬 말이냐’ 호통치는 분도 있었어요. 여느 상갓집과는 다른 풍경이었죠. 그리고 기억에 남은 그 장면들을 구례에 내려와 살면서 점점 구체화한 것 같아요. 사실, 이전에는 아버지가 출소 후에 왜 다시 구례로 돌아왔는지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나 같으면 내 이력을 모르는 곳에서 살았을 것 같은데. 자기에게 총을 겨누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누가 적이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그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던 오래된 장면들도 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순간, 그의 어머니는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허물어지는 장벽은 사회주의의 몰락을 의미하는 셈이었으니까. 젊은 시절 모든 것을 걸었던 그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담담하게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지아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견고할 거라고 믿으며 목숨 걸고 지켜온 사회주의의 붕괴를 지켜보는 기분이 지금 어떠시냐고. 아버지는 어딘가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건 게 아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을 뿐, 그때는 사회주의가 대안이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또 한번 이해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도 읽을 수 없었던 진짜 아버지의 진짜 마음 같은 것.
아버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어요.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텐 도움을 주고, 머슴처럼 남의 집에 가서 일해주고 하던 것들이 실은 아버지의 사상을 실현하는 일이었던 거예요. 결국 사회주의란 것도 사람들 속에서 사람을 더 나은 쪽으로 만들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평생을 결정지어버린 것은 겨우 4년간의 시간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부모의 정체성을 빨치산으로 고정시켜버렸던 것은 아닌가 싶다고 지금의 정지아는 고백한다. 그러니까 그 4년 동안의 투쟁이 『빨치산의 딸』을 통해 기록되었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 빨치산으로부터 아버지를 해방시키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것은 동시에 정지아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빨치산이 아닌 한 사람을 그대로 이해하는 일.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을 너무 다큐멘터리로 읽는 분들이 많아요”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 중, ‘사실보다 더 진실한 허구’라는 말은 사실에 비해 허구가 더 가치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신 정확한 사실만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또다른 측면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허구는 종종 진실에 대비되어 이해되지만, 진실의 부정은 차라리 무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현실의 잡다하게 얽히고 어지러운 문제들은 대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며, 오히려 저 허구적인 이야기를 통과할 때에야 복잡하고 모호한 면모를 겨우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컨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할 때 우리는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의 목록을 오래 기억할 수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다른 것을 잊어버린다. 곧, 무언가가 중요하게 기억된다면 상대적으로 우리가 망각해버린 것은 그밖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잊었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잊어버린다. 아버지를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실록’으로부터 벗어나, 정지아가 다시 ‘허구’로서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이리라.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만들어낸 인물이 많아요. 하지만 구례에 있는 누군가의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겪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저희 부모님이 싸우는 이야기는 다 사실이에요. 실제로 그렇게 싸웠어요. 조선일보 같은 반동 신문만 읽는다고 아버지가 핀잔하던 박선생과의 우정 같은 내용도 사실이고요.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한데 뭉친 경우도 있고, 다른 분의 경험을 소설 속 작은아버지에게 적용하기도 했어요. 반면 베트남 엄마를 둔 노란 머리 여자아이는 완전히 지어낸 인물이에요. 생전에 아버지는 베트남을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위대한 민족이라고 아주 높게 평가했어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무렵에는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열에 다섯 가구꼴이에요. 구례에서는 일상적으로 만나게 된 얼굴인데다가, 생전에 아버지가 오지랖이 넓은 분이라 고등학생이 담배 피우는 걸 보면 꼭 호통을 치시고, 그러다 나중에는 친해져서 같이 피우고 그러셨어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몇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꾸며 쓴 거죠. 그리고 소설과 아주 다른 사실은 실제로는 저희 아버지를 백운산에 수목장으로 모셨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이곳에 묻히고 싶을까? 아무도 없이 적적하게 깊은 산속에 홀로?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252면)
소설 속 아리는 유골함을 든 채 아버지라면 진짜 무얼 바랐을까, 하고 생각했다. 백운산 산속에 홀로 머문다면 외롭지 않을까. 그러고는 유골을 아버지가 머물렀을 만한 공간마다 조금씩 나누어 흩뿌렸다. 섬진강과 반내골, 거리 여기저기 아버지가 머물렀던 자리마다 아버지의 흔적을 남겼다.
조직이란 늘 사람 속에,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아버지였거든요. 아버지가 결정할 수 있었다면 소설처럼 선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를 나는 어디에 뿌리고 싶었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썼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정지아는 어머니가 홀로 남아 있는 구례로 생활지를 옮겼다. 한때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구례에서의 삶이 어떠한지 물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반내골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재구성되는 아버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원래 10년은 봐야 친구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라 연락하면서 지내는 사람들도 대부분 고등학교, 대학교 때부터 친구들이에요. 내려가서 처음에는 마트 갈 때나 외출을 했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았어요. 그래도 부모님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 찾아오시면 안 볼 수가 없잖아요. 그분들이 오실 때면 깻잎이며 고추장, 장아찌 같은 걸 잔뜩 들고 오세요. 시골 장에라도 나가면 어디서 ‘운창이 딸래미 아니여?’ 부르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고는 선술집 같은 데로 불러서 ‘자네 아버지가 전어무침을 그렇게 좋아했네’ 하고 권하세요. 제가 회를 잘 못 먹는데 그런 자리에서는 어떻게 안 먹겠어요. 서울에서는 맺을 수 없는 관계들이에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구례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어요. 내려와 있는 동안 그렇게 아버지와 연관된 사람들을 자꾸 만나고, 부딪히고 어느 식당에 가면 누가 또 아버지에 대해 들려주고, ‘이 양반이 아버지랑 얼마나 친한 사람이었네’ 소개받고. 그제서야 아버지가 빨치산만은 아니었다는 걸 새삼 알겠더라고요. 그냥 이 동네의 주민이고 이웃으로 살아왔구나, 아버지의 삶의 무대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런 만남들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거죠.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불편함을 주지 않는 관계를 지키는 것이 서울에서의 생활이었다면, 정지아는 구례에서의 생활을 통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계속 해주는 마음을 배운 것 같다고도 했다. 이해관계에 얽혀서 주고받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주고 싶어서 주는 마음. 어쩌면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아버지는 평생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정지아가 구례에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지금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은 구례라는 마을과 사람들을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265면)
*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루리야(Alexander R. Luria)는 셰르셉스끼라는 한 남성에 대한 30여년간의 임상 기록을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The Mind of Mnemonist, 1968, 한국어판 갈라파고스 2007)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셰르셉스끼는 수년 전의 대화나 무작위로 나열된 숫자의 조합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언제든 필요할 때면 모든 경험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고,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선명한 이미지의 형태로 머릿속에 저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르헤스(J. L. Borges)가 그려낸 ‘기억의 천재 푸네스’와 마찬가지로 셰르셉스끼 역시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불과 5분 전 일과 5년 전 일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는 것이 그에게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상상과 현실의 기억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푸네스의 경우는 이보다 더 심각해서 불과 1초 만에 눈앞의 사과가 방금 전 사과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의미있게 기억한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망각할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모든 것을 중요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상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적인 폭력이나 참사 뒤에 세워지는 추모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우리가 그 앞에 설 때,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기억할 수 있겠나. 그러므로 추모비가 우리의 기억을 단순화하고, 왜곡시킨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조차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조차 망각해버릴 것이다. 다만 추모비와 함께 우리가 더 기억해야 할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인터뷰 중 정지아는 여러번 더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다고 했으나 내게는 오히려 또다른 맥락 안에서 ‘다시’ 써보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까지의 기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덧대어 말해보겠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이것은 소설일 뿐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는 정지아의 해명은 사실, 더 진실한 기록을 위한 예비일지도 모른다. 『빨치산의 딸』이 훼손된 역사의 단면을 부모의 목소리를 통해 복원하려고 했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제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복원한다. 유쾌하면서도 불온하고, 담대하면서 동시에 나약한 장면들이 모두 단 한 사람의 몫이라는 것. 무엇보다 정지아가 그 둘의 가치를 모두 기억하는 작가라는 점이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내 나이대의 여성을 중심으로 20대의 손녀와 할머니로 이어지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온 여성 삼대의 이야기를 써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아마 우리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녹아 있겠죠. 빨치산은 아니고, 그냥 엄마로서.
아직 읽지 못한 그 이야기가 아마 정지아가 고백하게 될 가장 진실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