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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중일 金重一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가 있음. ppooeett@naver.com
토요일엔 헌화를
지난 봄 그물 같은 비가 내게 던져졌다 토요일이었다
아직 나는 그 빗속의 토요일에 갇혀 있다
온몸 구석구석 극지를 돌아다니던 들숨들이
얼룩처럼 셔츠의 끝단으로 가라앉는 저녁
옷깃과 소매가 잿빛이 되는 시간, 먼지처럼 내려앉는 시간
셔츠의 바깥, 공중이라는 제단 위에 얼굴과 두 손을 내어놓았다
셔츠의 바깥으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표정들이
셔츠의 끝단에 까맣게 쌓이는 저녁에 혹시 목 놓아 울 일 있다면
울기 전에 셔츠 소매부터 걷어붙일 것
헌 셔츠들이 가득한 토요일의 수거함
옛날 옛적 맨 처음의 토요일이란 거대한 수거함이 있었고
대대손손 토요일의 셔츠들이 수거함 속으로 던져지고
셔츠의 토요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이고
우리는 산 중턱 어디쯤에서 조난되고
토요일은 높은 파도처럼 솟구쳐 흰 셔츠처럼 밀려오고
하얗게 찢기듯 부서지며 일주일마다 우리를 덮치고
내가 벗어놓은 헌 셔츠의 밤
매번 의미가 그다지도 많아 결국엔 무의미해지고만
시구절이 적힌 파지처럼 주름 많은 나의 셔츠
내 허벅지에서 한줌 크게 떼어 애인에게 건네준 구름빵 같은
띄우자마자 줄 끊고 날아가버린 연 같은 나의 셔츠
지구 반대편 온종일 이어졌던 대낮의 교전이 잦아들고
꼽추처럼 굽은 등의 지구가 한장의 하늘을
사망자의 셔츠처럼 주워 입고
대신 셔츠 주머니에 꽂힌 빨간 볼펜으로
셔츠 주인의 사망통지서를 쓰고
셔츠 주머니 속으로 기어들어가자
그곳은 온통 검게 불탄 밤, 파편처럼 박혀 있는 별들의 막사
이불을 덮고 누우면 누군가의 셔츠 주머니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
이불을 정수리까지 천천히 끌어올리면
셔츠 주름 따라 검게 비가 고이는 밤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새벽을 쫓는 밤이, 새벽을 따라잡고
새벽을 앞질러 선두로 달려나가기 전에, 잠깐만 붙잡아놓고
비오는 토요일인 오늘은 무한대의 깊은 잠을 청함
침대 한가운데 내가 벗어놓은 셔츠
비 젖고 구겨진 채 활짝 핀 흰 셔츠는
나를 향한 이 새벽의 헌화
당신의 벼락
당신의 팔은 밤사이 당신에게 떨어진 벼락이에요
토요일이었던 어젯밤 당신은 그 팔로 벼락같이 날 끌어안았죠
멋대로 갈라진 벼락의 끝자락처럼 뜨거운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허리를 휘감고
내 온몸에 온통 당신의 손자국을 냈죠
내 온몸을 떠돌던 당신의 손은 지금 내 손바닥 위에
내 손금 속에 갇혀 있어요
그때가 벌써 언젠지 몰라요
오늘은 까마득한 어제의 멀고 먼 미래예요
내 손안에는 지금까지
내가 잡았던 손들이 켜켜이 쌓여 있어요
내가 잡았던 잿빛 손이 내 맥박을 타고 쏘유즈(Soyuz) 같은
내 피톨의 항진 경로를 따라 온몸을 떠돌다가 밤이면
내 손등에 내려앉아 내 손을 꼭 잡아요
내가 주먹을 쥘 때마다 그 손은 내 손을 꼭 잡아요
내가 주먹을 꼭 쥘 때마다 그 손은 내 손을 더욱 꼭 잡아요
나는 낡은 장갑처럼 당신의 잿빛 손을 끼죠
나는 잿빛 손으로 빨간 꽃을 꺾고 파란 벌레를 때려잡고 다시
내 무릎 위로 떨어진 낙엽 같은 갈색 손을 잡아요
잠든 멧새를 잡듯 조심히 잡아요 갈색 손은 조롱 같은
내 몸 안을 헤집으며 날아다니다가 팔목 위에 앉아 나를 봐요
나는 이제 깨야 할 꿈 밖으로 새를 먼저 날려보내요
새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멀리 날아가지 않아요
작게 소용돌이치며 그림자들 곁을 맴돌아요
오래전 잡았던 손이 여전히 내 손안에 있어요
오래전 놓았던 손이 내 손을 방한장갑처럼 끼고
아직도 추운 내 손안에 있어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울리는 손뼉 소리
나는 당신의 손이 날아가지 않게 주먹을 꼭 쥐고
당신의 손은 내 손을 빌려 끼고
내가 막 사랑하기 시작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요
당신의 손안에도 내 손이 가득하죠
내 손이 당신의 손을 찢긴 장갑처럼 끼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손을 모아 밤마다 기도할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벼락처럼 기도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벼락 같은 당신의 그 팔과 그 손으로
당신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