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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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한 李龍漢

1969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정신은 아프다』 『안녕, 후두둑 씨』가 있음. binkond@hanmail.net

 

 

 

한밤의 몽키스패너

 

여자는 식탁 위에서 자꾸만 늙어갔다

오래된 허공을 걸어왔으니

저녁은 발목이 아픈 여자의 형식이 되었다

서랍에 넣어야 할 몽키스패너를 설거지통에 던져버리고

입술에서 발밑까지 흘러내린 악몽

왼쪽 어깨를 들썩이며 여자는 몇번이나 고쳐 앉았다

인생은 어디에나 있어요

하지만 물이 새는 집에서 살 순 없죠

사방에 흩어진 페이지들

대체로 그런 동정은 접시에 담을 수도 없다

그녀가 물려받은 거라곤 쓸데없는 책들과 슬픔

어쩔 수 없는 몽키스패너

물끄러미 바닥에 앉아서 여기가 바닥이야,라고 말하는

여자의 등을 아무도 쓸어주지 않는다

맨날 체하고 지랄이야

소화가 되지 않는 저녁에

약도 없이 찬물만 마시다가 여자는 가만히 들썩인다

이유가 없어도 창문은 삐걱대고

7월의 느티나무가 부엌까지 가지를 늘어뜨렸다

살면서 고장 나는 것들은 언제나 고장이 나선 안되는 것들이다

시들어버린 손목과

고무패킹이 망가진 수도꼭지

언제부턴가 여자는 시집조차 읽지 않는 가장이 되었고

수선할 곳이 많은 엄마가 되었다

인생은 어디에나 있어요

하지만 모두가 떠난 곳에서 기다릴 수는 없죠

세상에 없는 당신

저만치 내려앉은 나뭇잎

한밤의 깊은 공중에 대고 여자는 힘껏 웃었다

 

 

 

푸른색의 고향

 

 

11월이 저물고 쉐프샤우엔*

푸른색 페인트가 벗겨진 골목에

번지는 아이들

새벽에 그것도 비가 내리는

계단마다 고양이 발자국

호텔 무니르(Mounir)에서 흘러나오는

박하 냄새

젤라바를 입은 베르베르인이

아무에게나 안부를 묻는

여기는 푸른색의 고향

염소의 뿔을 닮은 정류장

양탄자에 누워 종일 물담배나 피우고 싶은

외로움의 북쪽

하시시의 변두리

오래오래 걸음이 멈춘

당신의 입 다문 페이지

고개를 묻고 천천히

박하차나 한잔할까요

주전자 속의 별

창문은 뜨겁고

발밑은 외롭죠

고양이는 울고

가만히 내려앉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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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프샤우엔(Chefchaouen): 모로코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마을과 골목 전체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