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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함세웅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라의눈 2022

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기억과 묵상

 

 

김태우 金泰佑

한국외대 한국학과 교수 taewoo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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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룻밤은 마치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1975년 4월 11일, 청년 사제 함세웅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으로 끌려갔다. 음습한 벽을 넘어 피맺힌 절규가 들려왔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간절한 기도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이틀 전 인혁당사건으로 사형당한 청년 이수병의 시신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시신의 손발과 등은 온통 시커멓게 멍들거나 가혹한 전기고문으로 까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1974~75년, 민청학련사건에서 인혁당사건으로 이어진 일련의 ‘간첩단 사건’의 조작과 여러 청년들의 구속·고문·사형 집행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표적 장면이었다. 한국전쟁의 참상에 삶의 허무를 느껴 가톨릭 신자가 된 함세웅은 어쩌면 이같은 폭력적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정권의 적나라한 폭력과 직접적으로 조우하면서 그는 인생의 결정적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바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조직하고, 그 핵심 구성원 중 한명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함세웅 신부의 신간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해방에서 촛불까지, 기억하고 기리고 소망하다』는 해방 이래 한국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에 관한 역사교양서이자, 인류 최고의 고전 중 하나인 성서에 대한 한국적 맥락의 실천적 해설서이다. 또한 이 책은 저자의 삶의 중요한 변곡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서전적 성격의 고백록인 동시에 1985년부터 20년 동안 성심여대(현재 가톨릭대학교와 병합)에서 진행한 ‘종교와 사회적 책무’라는 강의 경험과 내용을 응축한 강의록 성격의 글묶음이기도 하다. 함세웅은 이 강의를 통해 종교를 우리의 삶, 겨레의 역사와 연결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는데, 이 책 또한 그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역사와 종교와 민중의 삶의 문제를 매우 조화롭게 융합하여 제시하고 있다.

책은 총 52개 장으로 나뉜다. 개별 장들은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관한 이야기부터 2000년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의 질곡과 성장을 보여주는 다양한 소주제들로 구성된다. 책의 구성에서 1960~80년대에 관한 내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시기적으로는 군사정권기의 폭력성과 그에 저항한 민중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한국현대사의 대표적 사건인 제주4·3항쟁, 4·19혁명, 5·18민중항쟁, 6월항쟁 등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고, 그것들을 성경의 특정 문구들과 연결해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해내기도 했다. 이같은 종교적 관점은 자칫 타종교 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에게 약간의 거부감을 줄 수도 있지만, ‘거룩한 글들의 도서관’이 보여주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심오한 통찰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본 서평자와 같은 독자들에게도 커다란 영감과 깨우침을 제공한다.

함세웅의 역사 서술이 여타 역사서와 구분되는 주요한 차별점 중의 하나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평가에서의 단호함과 명료성에 있다. 그는 결코 애매하거나 우회적이거나 평가를 훗날로 미루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구한말 고종의 대외정책, 해방 직후 주한미군의 성격(점령군/주둔군 논쟁),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 국회프락치사건,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평가 등과 같은 ‘논쟁적 주제’들에 대해 매우 선명하고 확고한 입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치 세상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날선 비판의 칼날을 한국현대사의 대표적 독재자들과 그 부역자들뿐 아니라, 과거 민주진영의 주요 리더들이나 가톨릭계 원로들에게까지 예외를 두지 않고 들이댄다. 그가 진정으로 눈치를 보는 대상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듯한 태도이다. 독자들은 그 분명하고 단호한 평가에서 때로는 억눌린 감정의 시원한 해소를 느낄 수도, 때로는 인간이라면 어찌할 수 없는 당혹감과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같은 상처 또한 독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문과 숙의의 과정을 선물할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

함세웅의 역사관은 저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서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시대는 늘 용기 있는 앞선 사람이 문을 엽니다. 그 문으로 한 시대가 통과합니다.”(142면) 이같은 주장은 자칫 ‘영웅주의적 역사관’으로 비판받기 쉽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용기 있는 앞선 사람”들의 대부분은 결코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현대사 속의 저명한 지도자나 영웅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1956년 지방의원 선거 과정에서 부정행위를 고발했다가 옥고를 치른 박재표 순경,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고통받은 13인의 제헌국회의원들(노일환 이문원 김약수 박윤원 김옥주 강욱중 김병회 황윤호 최태규 이구수 서용길 배중혁 신성균), 박정희 암살을 도와준 5명의 의인들(박선호 의전과장, 박흥주 비서실장, 유성옥 운전기사, 이기주 경비원, 김태원 경비원)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함세웅은 이들의 이름과 행적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적시함과 동시에, 경찰청 김구 흉상 옆에 박재표 순경의 흉상을 설치해야 하고, 국회의사당 내에 13인의 국회프락치사건 관련 국회의원들의 흉상을 모셔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더불어 김재규와 5인의 의인들에 대해서는 ‘10·26혁명’의 주역으로서, 이들을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재평가하고 추모할 때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함세웅은 이 책을 통해 역사 속 청년 열사들과 현시대 청년들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애정 또한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은 30대 초반에 죽임당한 ‘청년 예수님’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청년 안중근, 청년 김대건, 청년 김대중, 4·19혁명의 청년 희생자들, 전태일 김상진 박종철 이한열 조성만 열사 등의 결단과 희생의 가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런데 이같은 희생에 대한 강조는 어쩌면 현시대 일부 청년들에게는 어느 재야운동권 원로의 소위 ‘꼰대스러운’ 훈계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세웅은 청년세대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는 장에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뻐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코헬렛 11:9, 249면에서 재인용)

이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부류의 조언과는 사뭇 다르다. 바로 지금, 자신의 외로운 골방으로부터 탈주하여 두려움 없이 자기 생각을 개진하고 연대하고 당장의 불만스러운 현실을 적극적으로 고쳐나가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청년기를 힘껏 누리어 참으로 소유해버리라는 것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한국현대사의 청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여전히 우리 시대의 ‘청년원로’로 살아가고 있는 함세웅 그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한국현대사의 중심에 언제나 청년들의 용기와 희생과 절망과 환희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한국의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에게 동시에 전하는 ‘역사기도’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