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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혜령 張慧玲
2017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jaineyre0@gmail.com
고해(呱咳)
1
사랑하지 않지, 텔레비전을 켜둔 모텔 방
침대 위에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당신은
내 허벅지에 다른 손을 뻗거나
목을 조르며
뒤를 파고들 뿐이지
창밖엔 진눈깨비 흩날리고, 이 골목이
거리거리가
더러운 비닐을 덮고 누운
남자의 살냄새
쇼윈도 앞
쓰레기차가 지나간 자리
누군가 핏빛 오수를
튀기며 걸어가고
저기, 비명처럼
묶어도 새어나오는 것
2
불 켜진 창문이라면
어디든
두드리고 들어가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았다
하수구에는
피우다 버린 담배, 침을 뱉듯 떨어진
나뭇잎들
먼 창 너머
몸을 씻는 사람
쿨렁거리며
누군가의 피와 내장이
발아래로 흘러가는 소리
3
이 방의 거울은
낮게 붙어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베개맡에는
다른 사람이 자고 간 냄새
텔레비전에서는
울부짖는, 흐느끼는, 깔깔거리며
살점을 뜯는 소리
끝나가요, 칼을 든
정육점 여인이 기다리는 손님에게 말하듯
등 뒤의 당신에게
끝나가요
거의, 모든 것이
물의 언어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수의를 입은 눈보라
물가에는
종려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초록이
초록을
풍경이
색채를
간밤 온 비로
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
빛 드는 쪽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
이른 아침
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
떠나는 한 사람
종소리처럼
빛이 번져가고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
깨어나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