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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현승 李炫承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2002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이 있음. tuplos@naver.com
여행자
물가에 앉아서 다리쉼을 하였다.
구름이 무심히 강물에 제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다.
피가 몰린 다리를 주무르며 돌아본 얼굴은 무표정한 얼굴
구름처럼 눈코입이 지워져 있었는데
핏기 없는 얼굴로 하얗게 웃고 있었다.
주로 날고 가끔 걷는 새들도 비웃을 만큼 걸었는데,
나는 이미 아문센만큼 걸은 것 같고
이번엔 북극에서의 아문센보다 막막해 있다.
어쩌다가 나는 남극에 와서 헤매고 있는가?
풍경을 보고 있는 사람도 풍경이다.
관광책자 속의 항공사진 같은
절경을 보러 가서는 절경 속으로 들어간다.
절경에 가서 반대쪽을 본다.
헤어지는 사람이 실은 더 연애를 갈구하듯
죽으려는 사람이 가장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떠나온 사람들은 집 생각을 한다.
발바닥엔 남극대륙의 횡단거리를 붙이고
까만 제 눈깔을 핏기 없는 구름 얼굴에 붙여주면서.
기도에 대하여
꿈이 현실이 되려면 상상은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절망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라는 생각이다.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피 중이고, 유배 중이고,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 한다면
이런 질문,
한날한시에 한 친구가 결혼을 하고
다른 친구의 혈육이 돌아갔다면,
나는 슬픔의 손을 먼저 잡고 나중
사과의 말로 축하를 전하는 입이 될 것이다.
회복실의 얇은 잠 사이로 들이치는 통증처럼
그렇게 잠깐 현실이 보이고
거기서 기도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깊이 절망해야 하는가.
고독이 수면유도제밖에 안되는 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건 잠이겠지만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
그래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방에서 의자에서 자고 있지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