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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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李慧美

1988년 경기 안양 출생.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보라의 바깥』이 있음. panpolove@naver.com

 

 

 

잠든 물

 

 

많은 비가 내려

얼굴들이 곳곳에서 깨어졌다

 

빗방울의 마음은 기체의 완성

 

우리는 마주본다

노를 저어

배를 나아가게 하는 표정으로

 

검은 꽃들이 물밑에 누워 있다

얼크러진 물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얕아진다

 

모르는 깊이 속에서

잎사귀를 펼쳐올리는

꽃의 외연

찢겨진 옷자락을 이끌며 걷는

무른 발자국

 

여름의 통로를 지나

물이 눕고

가장자리를 버릴 때

 

우리는

으깨지는 중인

입속의 말들을 바라본다

 

녹아내리는 것은 감정의 완성

 

컵을 들자 발밑으로

표정이 쏟아져내렸다

 

좋은 위로에는 없는 관심이 필요한가요

 

붉음이 묽음이 되어가는 순간 묽음이 묵음이 되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하나의 물음으로 희박해져가는 시간

 

그림자 없는 잎사귀들이 솟아오르면

온몸이 부풀어 진물 흘리는

영혼의 젖은 코트

몸속에서 숨은 길들을 끌어올리는

수면의 완성

 

 

 

목련이 자신의 극()을 모르듯이

 

 

너를 안으니 상한 꽃 냄새가 난다 손톱이 파고든 자리마다 무르게 갈변하는 초승달들, 희게 진물 토해내는 상한 눈빛들

 

내 오래된 침대 위에 고인 흉한 냄새들이여 너에게 입 맞추는 동안 검은 잇몸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사람의 반대편에서 괴사한 공중이 온통 얼룩져내리고

 

손가락을 버리고 빈 곳을 움켜잡고서야 만개(滿開)를 짐작한다 나무들이 자신이 가진 초록을 모르듯 버려진 잎사귀들 잘린 혀로 꿈틀대다 조용히 자신의 색을 잊어가듯

 

죽은 성기들을 밟고 흰 계절이 온다 너의 입술이 열려 이 밤 가득 썩은 목련들로 낭자해질 때 갓 태어난 시체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가 자신의 온도를 모르듯이

 

순간들 사이에 거처를 마련하고 사라지는 방들을 내어주면 상한 달무리들 일제히 쏟아져 들어와 도사리는 저 검고 깊은 아가리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