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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끝별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가 있음. postellar@ewha.ac.kr
사랑은 간헐
시월은 암구름 발정기다 마파람에 게눈이다 게눈 따라 숫구름도 쏜살이다 나이아가라 구름 끝까지 따라붙는 숫구름만이 암구름 차지다 털 쌘 숫구름을 품으려는 암구름의 밀당법이다 하늘에 구름 한점 없고 말이 살찌는 이유다
하늘이 낮아지는 동짓달이면 숫구름은 느릿느릿 떼로 몰려다니다 내려앉다 갈앉다 흩어질 때면 너무 외로운 나머지 제 그림자를 눈사람처럼 세워놓기도 한다 그때쯤 암구름이 몰려와 유유적적 흰 그림자를 뒤지고 다니다 제 몸에 들어맞는 숫구름을 골라 입고 긴 밤 속으로 사라진다 그때마다 또 눈이 올 듯 말 듯
춘삼월 구름은 햇구름, 솜털보다 솜사탕보다 화안하다 갑빠처럼 알통처럼 숫구름도 헛꿈을 불린다 허파요 가빠요 까르르대다 훌렁 뒤집힌 후란넬 치마 속 흰 빤스처럼 암구름은 온몸이 궁둥이다 겨드랑이 오금이 가렵고 중구난방 봄구름에 알러지다
물 만난 구름철에 암수구름 상열지사는 다반사다 숫구름은 암구름 심장을 찢고 늑골에 고인 눈물을 빨기 시작한다 체온과 염도가 맞으면 제 눈물을 흘려넣기도 한다 상처가 아물 즈음 숫구름은 그대로 암구름이 된다 오뉴월 비가 잦고 비늘구름 뒤에 먹구름의 슬픔이 섞여 있는 이유다
천불 철탑
늙도록 홀로 흐른다 현해탄 너머 끌려갈까 싶어 산 윗동네에서 산 아랫동네로 혼인해 사별하고 분가시키고 장독대 지나 장작더미 지나 마을 입구에 구덩이 파고 목줄 걸고 막았으나 밀리고 밀렸던 밀양 할매 구름 김말해, 말해 뭣해
즈그는 법이 있고 우린 무법이라카는데
우리는 억울해도 분을 풀 데가 없다*
먹장구름에 싸여 지아비구름 끌려가고 새끼구름이 한 솜털 두 솜털, 밤이면 머리맡에 초승달 그믐달을 꽂아놓고 뜬눈으로 흐르면서도 흩어지지 못했다 어엿한 슬하 이루나 싶었는데 동지나해 너머로 끌려간 새끼구름 하나 허리에 금 가 돌아오고 새끼구름 둘 창졸간 흩어졌다 구름의 풍파란 이런 것
일자무식이라 내 이름도 못 쓴다
살아온 걸 썼으면 방 두개는 채웠을 텐데
늦도록 새로 솟은 철탑에 걸려 있다 한평생 흘렀으나 밥도 법도 말도 날도 저 구름 편이었던 적 없다 새끼구름과 빠져들고 싶던 저수지, 한때 한떼였던 구름들 묏자리, 시름을 펼쳐놓던 감나무밭, 이게 다라서 이게 전부라서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기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언 미수의 천불이 번쩍일 때마다 하늘 길을 열 듯 철탑에 걸린 층계구름이 보였다 어이, 헤이, 저 묵은 구름일랑 감나무밭 감잎 다 진 가지 끝 고운 무서리로 내려앉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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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은 보도연맹, 아들은 월남전, 나는 송전탑”(한겨레 2014.7.5) 기사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