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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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미 安賢美

1972년 강원 태백 출생. 2001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곰곰』 『이별의 재구성』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가 있음. gomgom69@naver.com

 

 

 

수학여행 가는 나무

 

 

나무는 쓴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고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쓴다 결국 떠날 수 있는 건 없다고 쓴다 다만 울음이 바닥났을 뿐이라고 나무는 쓴다

 

나무는 운다 굴뚝 위에 독재 위에 철탑 위에 올라간 사람들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해 나무는 운다 우리는 까닭이고 바보라고 나무는 운다

 

뿌리는 간다 어둠을 뚫고 바위를 타고 계급을 넘어 뿌리는 간다 울음을 찾아 울음의 핵심을 향해 울음의 연대를 위해 뿌리는 간다 사월로 오월로 세월에로 뿌리는 간다

 

나무는 난다 세계는 늘 위독하지만 특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특별해진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그 특별한 사랑을 기억하며 기록하며 나무는 난다 나무는 날아오를 것이다

 

 

 

서푼짜리 오페라를 위한 씨놉시스

 

 

그 식당 후추통 옆에는 색연필이 있다 고동색 색연필의 실밥을 당기고 있는 여자의 무표정을 생각하면 슬프기가 짝이 없다 여자로 한다 젊은 여자로 한다 그러나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젊은 여자로 한다 꿈의 파편으로 퍼즐을 만든다 그것은 늘 잃어버릴 운명의 한 조각의 문제이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그냥 죽느냐 개같이 죽느냐의 문제이다 천사의 날개는 십자가의 변형 같기도 하다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해 매일 실패하는 운명 무엇이 우리인가? 언제가 우리인가? 값싼 술에 취해 인생을 탕진해야 하는 여자의 운명이 오후 세시를 알리는 뻐꾸기시계의 뻐꾸기처럼 세번 등장하고 세번 퇴장한다 그 식당 후추통 옆에는 색연필이 있다 고동색 색연필의 실밥을 당기며 무능력하게 앉아 있는 여자로 한다 그러나 단 한번도 퇴장하지 않는 늙은 여자로 한다

 

우리 모두는 고동색 악몽에 연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