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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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처 徐婴處

1964년 경북 영천 출생. 2003년 『문학/판』으로 등단. 시집 『피아노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 등이 있음.

munji64@hanmail.net

 

 

 

도시의 규격

 

 

한 집 건너 한 집이 치킨점이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커피점이다 두 집 건너 한 집이 편의점이다 두 집 건너 한 집이 김밥집이다 거리마다 전봇대 간격이 일정하다 시내버스 발차 간격이 일정하다 아파트단지 동과 동 사이 햇빛과 그림자 간격이 일정하다 담보대출 상환날짜가 일정하다 가로수들 푸른 봉분을 하나씩 이고 발목 묶인 가로등의 간격이 일정하다 그렁거리는 가로등의 눈망울 주말에도 영세한 작업장엔 파우스트를 그리워하며 실을 잣는 여공들

 

개업하는 점집 옆의 타투가게 성인용품점 성업 중인 비밀도박장 옆의 가발전문점 파출소 폐업하는 24시 마사지숍 아래 24시 국밥집 차일이 눈꺼풀처럼 무겁다 보도블록 위 껌 자국이 총총하다 블록 틈마다 꽁초가 촘촘하다 칸칸마다 청구서처럼 입주한 사람들 규격 속에 들어가면 안심이야 도시는 가로수를 세로로 세운다 안구 돌출한 가로등을 심는다 공단 위로 매연을 마시고 양순해진 구름이 떠다닌다

 

내 잠과 네 잠 사이를 회유하는 귀신고래 등 위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은 꿈들 내 불안과 네 불운을 가로지르며 부침하는 섬들

 

 

 

스피커

 

 

불도저가 잠든 자들의 봉분을 뭉개고

굴착기가 잠든 자들의 꿈을 파헤쳤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차례 큰 사변이 지나가고 이제야

악몽처럼 벌떡벌떡 일어서는 뼈들

숭숭 뚫린 구멍마다 자리를 잡고 인광을 뿜어내는

아픈 자들의 터, 아파트

하나의 표정밖에 없는 가면을 쓰고 가면에 든다

하나의 표정밖에 없는 가면을 바꿔 쓰고 팔다리를 흔들며 노래한다

창과 벽들의 세계

이목구비를 잃은 얼굴들이 어른거리는

열한길 우물의 세계

깎아지른 봉우리들의 절경 사이로

네온사인이 호객하는 현란한 미래

두레박줄을 놓친 구름이 울음소리를 내며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