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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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인간의 시간』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등이 있음. imagine49@hanmail.net

 

 

 

피의 대칭성

 

 

백나일강 유역에서는 근세까지도 왕을 살해하는 전통이 이어져왔다는데 신화시대에는 지구 남쪽 여러 나라에서 7년 주기로 혹은 12년 주기로 왕을 살해하고 흉년이 들 때 가축들이 번식을 못할 때 달과 행성과 황도 12궁을 살펴서 사제들과 족장들이 주기적으로 왕의 목을 매달았다는데

 

나는 그 신화를 읽으면서 인류가 왜 그 전통을 넓게 이어가지 못했는지 5년마다 새 대통령을 뽑기 전에 대통령의 목을 따는 의식을 치르는 훌륭한 제도가 왜 정착을 못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곧 내 생각이 미숙했음을 알았다 이미 역사는 신화의 부활을 끊임없이 시도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역사시대에도 왕들은 끊임없이 살해되었다 역대 이 나라 왕들도 자기 명에 죽은 자가 몇 되지 않는다 자기 아들에게 살해된 왕도 부지기수다 짜르와 대통령과 황제 들도 군중에 의해 살해되어왔다 시체와 동상의 목을 요구하기도 했다

 

왕들도 반란을 일으켰을 것 자신의 목을 따는 사제를 제거해왔을 테지 사제가 사라지자 군중이 사제를 대신했을 때 왕들은 군중도 제거해왔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권좌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기에 자신이 밟고 있는 군중을 밟은 채로 헌법 1조에 올려놓고 가상의 주권을 허용하고 가상의 살해를 허용해왔던 것

 

하지만 군중이 기억하는 신화는 투표 살해가 아니라 피의 기억이었다 신화가 요구하는 것은 대칭성이었고 왕의 목은 저울의 반대편에 놓이길 원했던 것

 

권력의 무능과 횡포와 배제와 교만과 혐오와 차별과 학살과 수탈과 무모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파탄에 빠뜨리고 사지로 몰고 갔는지 공권력이 불에 태워 죽인 사람들과 수장시킨 목숨들이 구천을 떠도는데 임기를 마친 왕에게 명예로운 퇴진을 허용하는 것은 인신공양을 존속하자는 제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

 

아직도 권력이 신화를 낳고 있는 곳에 신화는 살아서 피의 대칭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의 변두리

 

 

오래전 그 일로 후회하고 수시로

후회한 일 한가지는

부산 제3부두 파나마 선적 살물선(撒物船)

떠나는 그 배에 손을 흔들었던 일

 

약속을 하고도 떠나지 않았던 일

그때 떠났더라면 뱃놈으로 평생을 늙어갔을지도

남태평양 적도 부근에서 섬 여자 하나 얻어 어부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그다니스끄나 함부르크 조선소 불법체류 노동자가 되었을지도

잠자는 나를 겁탈한 적이 있는

3등 항해사 게이 녀석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항구를 그리며 떠도는 3류 화가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시베리아 순록 몰이꾼이 되었을지도

볼리비아의 무장 게릴라가 되었을지도

안데스의 목동 가우초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이곳에 없는 나 때문에

이렇게 변두리에서 가슴 치는 일로 나이 먹진 않았을지도

 

내게 많던 나는 어디론가 다 떠나버렸다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내가 아니므로

나는 내가 꾸어온 꿈보다 더 가짜일지도 모르지

실현되지 못하고 떠나버린 내가 더 나다울지도 모르지

그런 내가 떠난 곳도 저 먼 변두리 이곳

 

세계의 모든 변두리에서 나는 나를 만져볼 수 있네

세계의 변두리를 떠돌고 있는 수많은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