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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유희경 兪熙敬
1980년 서울 출생.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이 있음. mortebleue@gmail.com
겨울은 겨울로 온다
겨울은 서로 닮았다 가운데쯤 나는 있었다 눈이 내리다 말았고 쌓인 만큼 녹았다 되도록 늦게 늦게 글자를 적는 사람처럼 또 눈이 내리고 떠올리고 잊고 안타까워서 나는 수첩을 덮듯 거기에 있었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떨듯 코트를 찾은 것은 앞에 입구를 두고 찾아 헤매는 形色 그러나 겨울밤이라면 나는 불을 끄고 곁에 누워 종알종알 모두 이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럴 건데 그렇게 될 텐데 자꾸 그러할 것인데 멈추지 못하고 하찮은 것들을 바라게 된다 아무도 없을 땐 그러다 누가 있기라도 하면 바닥이 바닥을 덮고 그 위를 손으로 덮어보는 생각
그래도 어쩌면 이렇게 아무도 한 사람도 남아 있지를 않을까 나는 자박거리는 지난겨울 닮은 것들을 여미고 감추며 바람이 가라앉지 않는 건너편에서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겨울은 서로 닮아서 가운데 그쯤 누가 있지 않으면 분간하기 어렵지 눈이 내렸고 쌓였고 그쳤고 녹기도 했으며 한 자 한 자 오래 걸려 적는 사람처럼 당신처럼 있다 나는 나는 거기까지 오래오래 걸어다녀온 기분, 그랬다
마흔두개의 초록+
그렇게 여름이 오기 시작한 지는 이년쯤 되었나 소맷부리 걷은 당신이 가고 남은 나는 자꾸 초록의 색을 헤아리게 되는 것인데, 어쩐지 다 세기도 전에 큰비 내리고 여름이 간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 마른 가지에도 초록은 있고 그것은 한 마흔두개쯤의 색을 숨기는, 가시지 않는 나의 습관이다 벗고 입고 생각하기도 하는 그 작은 것들은 잊을 틈도 없어, 어떤 꿈은 나를 그 앞에 데려가고, 각막부터 망막까지 짧은 새를 초록으로 시름시름 앓게도 하는 것인데, 앓다보면 봄이 온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여태 시월이고 초록은 아직도 가시질 않아서 오늘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다 올해는 여전히 올해로 남을 것 같다고 내년이 되어도 여전히 더 남은 것이 있을 것 같다고 또 며칠은 겨울 근처로 조금씩 움직여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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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오늘은 마흔두개의 초록을 보았어요,라고 말했던 날은 볕이 환한 초여름 저녁. 정말 마흔두개였나요.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날을 그날의 그를, 나를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은 그의 시집 제목이자, 그의 시 제목이며, 그의 이름이기도 하다. 먼 땅에서, 가깝게 살고 있는 시인에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