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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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4인 신작시선

 

곽재구 郭在九

1954년 광주 출생.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사평역에서』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와온 바다』 등이 있음. timeroad99@hanmail.net

 

 

 

중강진 1

 

 

젊은 담임선생님은 지도를 가리키며

중강진이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라 했다

 

그곳이 세계의 끝인가요?

내 눈을 들여다보던 선생님은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중강진에 갈 거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필라멘트가 나간 전구알에

구멍 난 양말을 씌우고 촘촘히 꿰매셨다

두 켤레를 겹쳐 신으렴

학교 갈 때 춥지 않을 것이다

중강진도 갈 수 있나요?

 

어머니는 처녀 적 만주 봉천에서 살았다

하얀 솜옷에 무명버선 세켤레를 겹쳐 신고 거리에 나가

놋쇠 양푼 속의 삶은 옥수수를 팔았다고 한다

 

작은 외삼촌이 중강진에서 벽돌공장 인부를 했구나

추운 땅이라 벽돌이 많이 팔렸단다

풍금도 잘 치고 노래도 잘 불렀지

어머니가 중강진을 알고 있다니

양말을 겹쳐 신으며 나는 눈이 커졌다

 

마적을 하던 큰외삼촌이 집에 돌아온 날

서탑 거리의 조선 사람들 호개胡犬 세마리를 잡았다고 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수수술 내음이 골목을 메웠다고 했다

호말胡馬을 탄 외삼촌과 털복숭이 동무들이 일렬횡대로

눈 덮인 벌판을 달리는 생각을 하는 동안 가슴이 뛰었다

그는 내가 모르는 세계의 끝을 가보았을 것이다

 

그가 밤마실을 할 때 공식이 있었다 한다

회벽 바른 집은 털지 않는 것

팔작지붕 집은 건드리지 않는 것

이민족의 집 곳간을 열어 수수술을 동무들과 나누어 먹고

흥에 취해 진도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눈보라 몰아치던 어떤 밤은

일본 헌병 주재소를 털었다고도 한다

 

자라면서 나는

중강진을 거쳐 만주 봉천에 가고 싶었다

허이허이! 말 달리며 세상의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어머니가 알전구에 꿰어준 양말을

몇켤레나 더 신어야 할지 모른다

 

아홉살 적 내 꿈은 마적이 되는 것이었다

중강진과 만주 봉천을 나와바리 삼아

계통 없이 사는 인간의 운명을 털고

신나게 다음 지평선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