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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임경묵 林敬黙
1970년 경기 안양 출생. 2008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체 게바라 치킨 집』이 있음.
bomnun89@hanmail.net
검은 개의 기분
새로 만들어진 바닷가 산책로에
검은 개가 앉아 있다
늙은 여자는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한 손으로 개 목줄을 만지작거린다
가끔 개의 이마를 사랑스럽게 쓰다듬는다
검은 개는
움치고 앉아
꼬리를 늘어뜨리고 갯벌을 바라보고 있다
썰물 지자 갯벌에 살이 붙는다
검은 개로 태어나서
자기보다 더 검고 더 거대한 것은 처음 본다는 듯
자기보다 더 검고 더 거대한 게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는 건 생전 처음이라는 듯
검은 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갯벌을 향해
컹컹 짖는다
혓바닥을 길게 빼물고 침을 질질 흘린다
어땠을까
검은 개의 기분은,
늙은 여자는 개 목줄을 바투 쥐고 아직 교양있게 통화 중인데
어땠을까
목줄에 묶인 채
맨발로 서서
파도의 잔해가 주름마다 먹먹한 갯벌을 바라보는
검은 개의 기분은.
폐가의 자세
잡풀 우북한 대문에 누룩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
마당은 풋콩처럼 불안하다
초록의 사마귀가
섬돌에 앉아
발음기호만 남은 처마를 올려 보다가 담장 너머로 천천히 날아간다
종일 빈방에
버려진 납 활자처럼 누워 있던 폐병쟁이 어둠이
무연히
마당의 적막을 엿듣다가
또,
밭은기침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