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정화진 鄭華鎭
1959년 경북 상주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등이 있음. loquens-school@hanmail.net
너에게 강을 빌려주었더니
1
옷이 없어요.
저는 옷이 없습니다.
춥지도 않아요.
무엇에 홀린 것도 아닙니다.
품 안에 언제 살아날지도 모르는
아이가 있습니다. 붕대인지 얇은 모포인지
아이를 감싸고 있네요.
제가 낳은 것도 같고, 길에서 주운 아이 같기도 합니다.
숨은 붙어 있지만, 물을 게워내고
꽃잎이 떨어집니다.
저는 옷이 없습니다.
군용차에서 긴 손이 다가와 모포와 몸을 감쌀 수건을
주었어요.
길은 검고 희고
꽃나무는 번쩍입니다.
저는 옷도 없고
아이를 안고 집으로 가야만 합니다.
길이 너무 어두워
어떻게 이 아이를 데려가야 할까요?
군용차들은 검은 길 위에
저는 벗은 나무인 채
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집으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집으로 가야 합니다.
저 피 토하는 아이를 안고 가야만 합니다.
저는 옷도 없어요.
강을 빌려주었더니 옷이 없다고?
저는 옷이 없답니다.
길이 너무 어두워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어요.
저는 옷도 없고
아이를 안고 집으로 가야만 합니다.
2
노인 너의 벼랑 끝, 밭은 흐리고 검기만 하구나.
여자 제가 가는 길을 이제 거둬가지 말아주세요.
노인 빌려준 강을 경작하지 못하다니, 이 강이 어떤 밭인 줄 알기나 하니?
목탄과 물고기를 제자리에 돌려놓도록 해라.
여자 이 도시의 입구에 서 있던 죽어가는 고목에 쉼 없이 강물을 주었다니까요.
그때 별안간 밭과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옷이 없습니다.
군용차에서 긴 손이 다가와 모포와 몸을 감쌀 수건을
주었어요.
길은 검고 희고
꽃나무는 번쩍입니다.
여자 이 문장은, 이 도시는, 매우 의심스러워요. 어디서 본 듯한 아이죠?
저는 옷도 없고
아이를 안고 집으로 가야만 합니다.
길이 너무 어두워.
노인 강을 빌려주었더니, 네가 원한 건 복숭아였단 말이냐?
여자 어떻게 이 아이를 데려가야 할까요?
군용차들은 검은 길 위에
저는 벗은 나무인 채
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노인 강을 빌려주었는데 네가 밭을 만들고, 아이를 낳았다고?
여자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집으로 가야 하는 길입니다.
노인 꽃 피지 않는 나무는 죽은 강이다. 네가 기른 아이들은 서역국의 과일이 아니라 내가 빌려준 물고기들이다.
여자 오, 할아버지, 20년 동안 저를 살피지 않으셨잖아요.
집으로 가야 합니다.
저 피 토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저는 옷이 없어요.
노인 강을 빌려주었더니 옷이 없다고?
목탄을 불쏘시개로 너는 그 빛나는 상상창고를 불태우지 않았느냐?
저 길 밖으로 네가 떠나고 나는 외로웠다.
여자 이 도시를 떠날 순 없어요. 제 아이들, 유리질로 변한 물고기들을 돌려주세요.
저는 옷이 없답니다.
길이 너무 어두워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어요.
저는 옷도 없고
아이를 안고 집으로 꼭 가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