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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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朴賞淳

1962년 서울 출생.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자네트가 아픈 날』 『Love Adagio』 등이 있음. silktable@naver.com

 

 

 

핀란드 도서관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핀란드 도서관에는,

따뜻한 불빛, 제멋대로 놓여 있는 책들, 달콤한 것들.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하늘에서 쏟아질 듯, 따뜻한 밤이었음.

노르웨이, 스웨덴, 그 옆의 핀란드는 아니었음. 도서관도

아니었음. 처음에는 나도 알지 못했음.

입구에 누군가가 써놓은 작은 글씨 하나, 핀란드 도

서관. 윗줄에 ‘핀란드 도’ 그리고 조금 아랫줄에 ‘서관’

그런 핀란드였음.

 

어제는 농구장, 삑삑삑, 후다닥, 선수들의 연습장에

갔었음. 코치 만났음. 난, 농구 모름, 잘 모름.

아무튼 만났음, 짧게 눈인사만 하고 빠지려고 했는데,

아, 후원자시라고요, 보호자시라고요. 반갑, 고맙.

아, 넷, 예. 그렇게 얼버무리고 농구장을 나왔음. 그 선수

난, 잘 모름. 하지만 지난주 일요일 아침,

노란 깃발 찾으러 얕은 개울 건너 겨우겨우 찾아간

왼쪽 집, 나를 닮은 여자아이들이, 어, 그런 깃발 모릅니다.

뒷집까지 갔다가, 오른쪽 집에서. 아, 깃발.

할아버지 한분, 노란 깃발! 소리 듣자마자

입 다물고, 눈 감았음.

한참 동안 침묵. 왠지 쓸쓸한 침묵. 깃발은 못 찾았음.

 

그 노란 깃발을 찾으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나에게 남긴 유언, 나에게 씌워진 숙명, 그 노란 깃발

찾으려면 농구장에 가보게나, 개울 건너 꽃길 지나,

선수들의 연습장. 다음에는 붉은 산, 다음에는 검은 산,

그다음에는 무슨 산. 또 무슨 산.

그렇게 한달, 두달, 십년, 백년, 아저씨와 맴,

벚나무와 맴, 하현달과 맴돌라 하니

모르겠다. 담 쌓았음. 마음의 벽 세웠음, 세상의 문

걸어 잠갔음. 노란 깃발 새로 만들었음.

진짜처럼 만들었음. 벽에 걸었음.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핀란드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음, 아무도 못 들어옴. 아무도 모름. 누구도

찾지 않음, 노란 깃발 벽에 걸고, 나만 살고, 나만 놀고,

따뜻한 불빛, 제멋대로 놓여 있는 책들, 달콤한 것들.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하늘에서 쏟아질 듯,

그런대로 따뜻한 밤이었음. 삑삑삑, 후다닥, 그 선수

어디론가 사라지고, 쿵쿵쿵,

아랫집의 한 사내, 어젯밤 사망했다는 소리. 개울 건너

오른쪽 집, 그 할아버지 사망했다는 소리,

이 산 저 산, 무슨 산, 또 무슨 산의

내 숙명 같은 노루도, 나를 닮은 어린 짐승들도 산불에

새까맣게 타 죽었다는 소리, 못살겠다는 소리,

죽는다는 소리, 죽었다는 소리, 더는 못 놀겠다는 소리,

지랄, 지랄, 지랄, 지랄,

핀란드 도서관의 문짝 갈라지는 소리.

 

벽에 걸린 노란 깃발 떨어지는 소리. 그래도 아니 그런 척,

아니 죽은 척, 귀 막고, 원하는 만큼 충분히,

원하는 행복 충분히, 원하는 고통 충분히, 원하는 슬픔

충분히, 나만 살고, 몰래 살고. 아니 죽은 척 살고……

따뜻한 불빛, 내 눈에만 불빛, 사라지는 불빛.

진짜 노란 깃발 펄럭이는 소리, 핀란드 도

서관 무너지는 소리. 내 소리 끊어지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