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리뷰
믿을 수 있는 소설
노태훈 盧泰勳
문학평론가.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dacapolife@gmail.com
내게 『창작과비평』(이하 창비)은 늘 문예지이다. 십여년 전 교내 도서 장터에서 치기와 지적 허영이 잔뜩 어린 채 5년 정기구독을 신청한 이래로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 뒤적여보니 그때의 창비와 지금의 창비는 거의 다르지 않다. 2007년 봄호에는 “2007, 한국사회의 미래전략”이라는 특집이, 2017년 봄호에는 “촛불혁명, 전환의 시작”이라는 특집이 실려 있다. ‘논단’과 ‘현장’이라는 이름의 지면도 그대로이고, 대산대학문학상도 여전히 이어져왔다는 게 보인다. 무엇보다도 열명 내외의 시인이 두편씩의 시를 싣고, 네명 정도의 소설가가 작품을 발표하는 방식에 전혀 변화가 없다. 십년 동안, 더욱이 최근의 문예지 혁신 물결 속에서도 창비가 전통적인 형태를 고수한다는 점은 오히려 신선하고 미더워 보인다(『문학3』이라는 돌파구를 선보이긴 했지만). 적어도 소설에 관해서라면 창비의 선택은 늘 안정적이다. 신인작가에게 지나치게 인색하지는 않다고 생각되지만 중견급의 검증된 작가를 주로 선호하는 것 같다. 2007년 봄호의 작가는 정찬, 성석제, 오수연, 김태용이었고 2017년의 작가는 김금희, 강영숙, 김려령, 김애란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으로서, 문예지 창비에 실린 네편의 작품을 일별해보고자 한다.
김금희는 첫 장편 『경애(敬愛)의 마음』 연재를 시작했다. 단편의 작가로서는 이미 검증을 끝낸 이 작가가 긴 호흡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지켜볼 일인데, 1회분으로 짐작건대 김금희의 단편에서 빛나던 장점들, 그러니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인물, 신념이나 가치의 허무함, 관계의 묘한 지속, 독특한 회고적 감성 같은 것들이 여전한 듯 보인다. 단편 작업도 동시에 병행하고 있는 이 부지런한 작가에게 이제 ‘김금희스럽다’는 표현을 쓰면 저절로 많은 것이 설명될 것 같다.
강영숙의 「두고 온 것」은 정신병으로 미쳐버린 아내 지연과 이를 지켜보는 남편 민수의 이야기이다. 초반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이 교차하는 리듬, 그리고 건조한 단문의 문체에 익숙해지자 속도가 붙었다. 지연을 병원에 가둔 채로 그들의 추억이 있는 호텔로 향하는 민수에게 호텔 출입은 쉽게 허가되지 않는다. 공사가 중단된 호텔, 그를 가로막는 경비 등의 설정, 그리고 결국은 우연한 기회에 호텔의 내부로 들어서는 장면은 다분히 카프카적이어서 조금 예측 가능한 전개였는데, 호텔에서 민수가 맞닥뜨리는 것은 비단 지연과의 추억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기억이기도 해서, 그것이 결말 부분의 강렬한 유년의 이미지와 이어져 소설의 설득력을 높였다. 물론 모호하고 믿을 수 없는 서술로 귀결되는 마지막 장면이 민수마저 의심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호오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서사에서는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전략이라 생각된다. 그러니까 결국 민수가 ‘두고 온 것’은 그 “패딩 점퍼 샘플”(186면)뿐만 아니라 지연이기도, 또 민수 자신이기도 했다는 것. 기억의 왜곡이나 회귀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이를 보여주기 위해 동원되는 상징과 이미지가 과다하다는 아쉬움도 분명히 있다.
김려령의 「청소」는 좋은 단편소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일주일간 집 안 곳곳을 모두 정리하고 청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과정에서 이 인물의 삶 전체를 녹여내는 솜씨가 자연스럽고 탁월하다. 단편소설의 길이에 딱 맞는 일주일간의 청소 과정은 놀랍도록 디테일하게 그려지는데 바로 그 덕분에 어쩌면 뻔하게 읽힐 수밖에 없는 이 이야기가 약점을 극복하게 되었다. 청소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소설이 주는 실감의 늪에 빠져 엄마의 ‘선택’을 빠르게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청소가 결말을 잘 감춘 덕에 마지막 장면에 도달했을 때 진폭이 컸다. 결국 홀로 힘겹게 아들, 딸을 키워온 엄마가 그 생활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로 결심하는 소설인데, 사뭇 가벼운 톤으로 그려지고 있긴 하지만 사실 비극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엄마’의 자살 암시로 읽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 소설의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이야기 자체도 그렇고, 인물·구도 등이 전형적이라는 것일 텐데, 결말마저 생을 정리하는 서사로 읽어버리면 오히려 단순하고 시시해지는 느낌이다. “그녀가 집을 나갔다. 다 닦고 다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긴 채였다”(207면)라는 마지막 문장이 그러하듯 엄마의 ‘이후’는 충분히 열어두는 편이 좋겠다.
김애란의 「가리는 손」은 고민할 필요 없이 올해 발표된 소설 중 손꼽히는 작품이다. 작가 김애란의 탄생과 그 행보를 쭉 함께해온 독자라면 이 작가가 우리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영원히 동세대라는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소설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보여주고 싶다. 세대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내가 낳아 길렀어도 아득한, 다시 말해 ‘분명한 타인’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 어마어마한 간극을 좁힐 가능성이 있긴 한 것일까. 소수자는 늘 윤리적인가. 어쩌면 우리는 도덕적 강박에 휩싸인 채 “예쁜 합리성”(217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쿨함과 꼰대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다문화’와 ‘틀딱’은 또 얼마나 가까운가. 혐오와 폭력은 어떻게 일상화되는가. 이 소설이 품고 던져내는 질문은 이토록 다양하다. 그런 질문이 작금의 현실과 조우하면서 믿고 읽을 수 있는 문장들로 육박해올 때, 어떻게 이런 소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계절에 문예지에 발표되는 단편소설들이 약 백여편 되는데 그중 좋은 작품은 반드시 있고, 그 작품이 창비에 실렸을 가능성은 꽤 크다. 그만큼 창비의 소설은 믿고 읽을 수 있다는 뜻일 텐데 그게 바로 메이저 문예지의 힘이 아닐까 싶다. 감식안을 가진 편집위원과 숙련되고 안정된 편집자, 작가들과 독자들의 고른 지지 등은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비가 늘 그랬듯 ‘문예지’로서 더욱 풍성한 창작란을 꾸려주기를 앞으로도 기대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