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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경미 金京眉
1959년 서울 출생.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고통을 달래는 순서』 『밤의 입국 심사』 등이 있음. lilac-namu@hanmail.net
역무원을 찾아서
유자꽃 때문이었다
오렌지나무 때문이었다
아니 기차 때문이었다
다섯개인지 여섯개인지 잇단 간이역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겨드랑이 간질대는 이름들 때문이었다
실은 역무원 때문이었다
아니 다 그만두고 실은 그가 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가 역 이름들을 말할 때마다
스피커에서 어떤 세계가 쏟아져나왔다
이슬의 세계거나 망치의 세계거나
헤어진 연인이 7년 만에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마침내 전화를 했어요, 같은 세계
프로레슬러의 팬티나 손바닥의 세계,
그 손이 가진 오르간 취미 같은
뜻밖에 다르거나 뜻밖이지만은 않은,
슬쩍 젊거나 슬쩍 젊지 않은
세계,
돌아와서까지 내내 기차보다 더 자주 들이치다니
뭐라고 계속 잊히지 않다니
유자꽃인지 레몬꽃인지 떨어질 때쯤 끝내
또 갔다
당신은 이 일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떤 전투에선가 받았던 편지를 챙겨 들고
기어이
유자꽃인지 레몬꽃인지 다섯개인지 여섯개인지
기차도 역 이름들도 다 지났는데
그가 없었다
그럴 리 없다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두번, 세번이나 더 갔는데
다른 세계였다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은 안 돼, 틀렸다고 말하는 세계
몸이 반만 찬 들고양이처럼 퀭한
나처럼 그도
한없이 배회하고 있을 것 같은 세계,
오르간 치던 손바닥이 피투성이로 덜렁대는 세계,
꼭 만나서 당신이 내게 7년 만의 사랑을
되찾아주었다 인사하고픈데
없는,
어쩌면 높이 승진했을지도 모를
사라짐의 세계…
눈빛의 규모
1513년 9월 25일
‘미스터 발보아’의 두 눈에 의해
태평양이 처음 발견됐습니다
끝없는 망망대해 바다가
1513년 9개월간을
어 거기 있었어? 왔었어? 전혀 몰랐는데?
파티장을 내내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왔다 갔는지 모르다가
누군가의 눈빛 하나에 갑자기
모두가 파티복 차림 그대로 수영장에 뛰어들며
그의 이름을 소리 높여 축하 환호하는
태평양의 생일이 된 거죠
나는 모기를 쉽게 보지 못하지만
모기는 나를 샅샅이 쉽게 보는 구조
벙어리장갑처럼 흘러가는 뭉게구름들
모래밭에 떨어진 바늘을 얼른 줍지 못하는
그 크고 뭉툭한 손끝들
나는 밑단 터진 치마와 바늘을 든 채
거대한 구름들을 바느질함 속 몇장의 천 조각처럼
언제라도 꿰맬 수 있을 듯 유유히 세어보죠
그 뒤집힌 규모가
그렇게 무서운 줄 알아서
누군가가 뚫어지게 쳐다보면
수십년 된 몸이 휘청대죠
티끌에서 태어난 바다가
처음으로 거대한 생일축하 케이크를 받고
너 왔더라 너 왔다 가는 거 다 봤다
널 보는 눈빛이 다르더라
역전의 규모에
적어도 반경 천오백 킬로미터,
일억 오천 센티미터의 시속으로 세상이
난생처음인 듯 출렁인다죠
단지 두개의 눈빛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