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리뷰
일상의 광장을 일구는 길잡이
이승준 李丞焌
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gamja@hani.co.kr
지난해 말부터 계속된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으로 이어진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한국사회의 열망을 다시 마주했다. 하지만 광장의 열기가 ‘반쪽 개혁’으로 끝나고 말았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수동혁명’으로 귀결되리라 예단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익숙한 패배주의 앞에서 반박할 말을 쉽게 찾지 못했다.
그러다 읽은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의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는 자세를 고쳐 앉고 읽을 수밖에 없는 글이었다. “6월항쟁 이후의 사태를 두고도 ‘미완의 혁명’과 ‘죽 쒀서 개 주기’라고 말하는 논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자칫 이는 사회변혁보다 정권의 향방에 더 집착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23면)라는 백낙청의 지적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 대선 정국으로 접어들며 촛불이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지만 “촛불 혁명으로 ‘정권교체’ 프레임 자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24면) 시각은 날카롭고 유효하다.
박정희 모델 넘어서기와 개헌의 방향에 대해 서술한 대목에서는 3년 전 국회에서 보낸 겨울이 떠올랐다. 당시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 해산을 앞두고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담론이 쏟아져나왔지만, 이물감을 떨칠 수 없었다. “‘빨갱이로 몰린 자에게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관습헌법이 작동해온 것”(31면)이라는 백낙청의 말대로 박근혜정부의 ‘종북 프레임’에 한국사회의 수많은 구성원들이 위축되고 스스로를 검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로 드러난 ‘블랙리스트’는 통진당 해산 이후에도 계속되어온 ‘종북 프레임’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대선 후보들의 ‘안보 우클릭’ 행보도 눈에 띈다. 이러한 ‘이면헌법’의 폐기가 시급하다는 백낙청의 주장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핵·미사일 실험을 이어가는 김정은정권과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일의 파워게임 속에서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깜깜하기만 하다.
촛불은 일상 속 ‘작은 광장’에서도 계속돼야 한다. 육아휴직 중에 읽었던 터라, 낸시 프레이저의 「자본과 돌봄의 모순」에 눈이 갔다. 프레이저의 지적대로 돌봄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배경조건”(333면)이다. “남성지배와 연결된 사회보호도 불만스러웠고 사회 재생산을 무시한 시장화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필요한 것은 해방을 안겨줄 제3의 대안이었다”(341면)라고 여성(또는 페미니스트)들이 처한 갈등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돌봄노동의 위기를 금융자본주의의 틀로 분석해 오늘날 ‘맞벌이 가족’ 모델이 신자유주의적인 레짐에서 비롯됐다는 글쓴이의 시각은 날카롭다. 일단 이번 대선 후보들의 육아 공약을 살펴보면 돌봄노동의 주체로 ‘아빠’를 처음으로 호명했다. 더이상 여성에게만 전가해서는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가 담겨 있다고 본다.
안병옥의 「섭씨 2도와 인류의 미래」를 보면서 4년 전 에너지와 핵발전소 관련 취재를 하면서 끙끙대던 고민들이 다시 떠올랐다. 2016년 겨울호에 실린 이필렬의 글 「기후변화, 인공지능, 자본주의」을 읽고 나는 ‘기술 낙관론’에 희망을 가졌다. 핵발전소를 점차 줄이고 결국 ‘탈핵’으로 가기 위해서는 신재생에너지의 활성화, 에너지 공급 효율화 등 기술적 대안이 해법을 제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구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원 및 에너지의 이용방식, 경제구조, 사회조직의 전면적 변화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술진보가 위기탈출의 보증수표는 아니다”(367면)라는 안병옥의 지적에도 반박하기 어렵다. 실제로 정부는 인구가 줄고, 에너지 소비가 줄고 있음에도 ‘인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할 것이다’라는 장밋빛 전망을 근거로 화력, 핵 발전소 증설을 뼈대로 하는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을 짜고 있다. 결국 지금의 성장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서는 ‘탈핵’으로 가는 시간도 줄일 수 없을 것이다.
대화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도 눈여겨봤다. 창비가 청년들에게 마음과 귀를 연 것이 신선했다. ‘평화시위’ 논란과 ‘시위 속 여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평화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전략’이었고, 그 선택은 여전히 유효”하다거나(81면) “예전 같았으면 ‘대의가 있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했겠”지만 “변화가 가능했던 건 누군가가 끌고 가는 집회가 아니었기 때문”(86면)이라는 대목에서 청년들이 이번 촛불을 바라보는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창비가 근엄하고 딱딱한 ‘50대 남성’의 이미지에 갇힌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이러한 시도를 통해 다양한 세대 및 성별과 소통하는 창비로 거듭났으면 한다. 대화에 참여한 청년들 모두 ‘일상의 촛불’과 ‘작은 광장 만들기’를 고민한다. 나 역시 정신없이 펼쳐질 일상에서 촛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촛불을 들고 일상의 광장을 일구는 데 『창작과비평』은 든든한 길잡이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