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문성해 文成海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1998년 매일신문,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자라』 『입술을 건너간 이름』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등이 있음. chaein00@hanmail.net
서설홍청(鼠齧紅菁)*
아주 예스러운 쥐가
순무를 갉아먹는 그림 앞에서
무즙이 가득 찬 쪼고만 위 하나를 떠올리는 이 심사는
내가 아무래도 뭔가 잔뜩 뒤틀려간다는 게지
선뜩한 순무즙이 가득 차서
겨울 밭 위를 웅크리고 지나갈 그것을 생각하니
내 오장이 냉랭해져오는 것이
서리나 눈발이 오히려 따뜻할 거란 게지
희고 쨍한 눈의 손바닥 위로
붉은 순무로 가득 찬 쥐 하나가
새끼 밴 배를 끌며 갈 때
꽝꽝 언 겨울 순무 하나가
걸어간다고도 생각했던 게라
순무 한마리의 걸음이
눈길 위로 붉은 발자국을 남기는 거라고
그건
내 잡다하게 들어 있는 밥통으로는 따라가지 못할 길이라고
보드라운 눈길 위로 맑은 순무의 무게가 옴팍옴팍할 거라는 게지
가도 가도 순무의 길이라는 게지
최북**이 그랬단 게지
홀로 날깃한 뱃가죽을 밀며 끌며 가는
환쟁이 길이
무즙처럼 헛헛하고 술렁거리는 것이
가도 가도 따뜻한 방과는 멀어졌단 게지
* 쥐가 홍당무를 파먹다.
** 崔北, 조선시대(18세기)의 화가.
나의 거룩
이 다섯평의 방 안에서 콧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대며 자는 어린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 속으로 쐐애 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가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 날 듯 바닥 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
오렌지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것과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세탁집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유행가로 들리는 것도 신기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하던 생활이
옆구리에 낀 거룩을 도시락처럼 내미는 오늘
소독 안 하냐고 벌컥 뛰쳐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조차
참으로 거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