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조정 趙晶

1956년 전남 영암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 『그라시재라』 등이 있음.

orengrium@naver.com

 

 

 

양관(陽關)

 

 

지구에게 말 걸기 좋은 자리였다

 

세미하게 늘어뜨린 당사(唐絲) 아지랑이로 사막이 넘실거렸다

감각의 채무자인 경련과 질식 쪽으로

시간이 꼬리를 물고 나아갔다

모래 밖으로 뜨거운 혀가 나와 발을 핥아주었다

 

걷다 멈추면 무너지는 절이 저 끝에 있나요?

코발트빛 도편은 날아가 어제 태어난 별의 정오가 되나요?

누가 저리 설레요?

천산의 눈 녹아 흐르는 강이 시간 너머에서 숲을 일으키나요?

탑 쌓을 돌멩이 하나 없는데

마음을 어디에 얹어요?

 

죽음을 동무 삼아 떠난 이들은 구름 전대를 차고 갔다

샘물이 솟고 어린아이들 달리는 풍경이

오래 발효하는 길이었다

머뭇거리는 자취도 풀을 맺는 기약도 낙타 오줌 냄새도 남기지 않았다

 

지구가 가엾게 들어 올린 정자 난간에 기대어

미라 한채

질(膣)을 타고 선뜩선뜩 모래가 흘러내렸다

 

 

 

대설

 

 

오늘은 다르다

현관 밖에 놓인 화분이 중얼거렸다

 

공중의 밑변을 압축하는 흰 수피 춤의 나선이 어지러웠다

기록되지 않을 자취가 헤아릴 수 없는 각오처럼 흩날렸다

바람의 옆구리가 얼기 시작했다

붉은 남천 열매가, 칠 벗겨진 횡단보도가, 쥐똥나무 사이 길고양이가 사방 거리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기다림도 마음의 틈이라 굳게 여며 추위를 막는다

옹송그리는 혼백들의 발가락 틈에 혀를 댔다

몸 밖을 흡착하는 내부가 뜨겁다

돌이 목에 차오르고 어져녹져 참혹이 혈관 아래 꿈틀거린다

이 눈보라는 도무지 축원의 효과가 늦다

헉헉거리며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걸어도 길이 줄지 않고 외따로 서도 외롭지 않다

쥐면 손에 바늘이 한주먹이다

 

땅이 신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