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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신규 朴信圭
1972년 전북 남원 출생. 2010년 『문학동네』로 작품활동 시작. poemuse@hanmail.net
미류를 부를 때
모든 것은 너의 입술에서 흘러나와
흘러가는 두 음절에서 시작되었네
숯의 무늬로 잠든 겨울나무에 입술을 대고
미류— 하고 나지막이 몸속 현(絃)을 퉁길 때
새싹 불씨 번져서 걷잡을 수 없는 선율로 타올랐네
겨우내 벌거벗은 은신처는 비로소 무성하게 은신하고
얼어붙은 공중의 길은 다시 둥지로 흘렀네
새소리 넘쳐내려 여름의 심장을 적시고
너의 입술이 동그랗게 다시 미류—라고 연주할 때
온몸으로 활활 나무는 흘렀네 밤하늘 너머 강변까지
은하의 수원지, 미류에선
무엇이든 시작하지 않고는 죽는 게 나아서
나무의 불길에 방을 들였네
재가 될 때까지라고 무작정하고
더없이 뜨거워졌네 우리는
물속과 불속을 뛰어다니고 울고 할퀴었네
허기를 지나 코피가 터질 때까지
알몸으로 노래하기를 하염없이 반복하다가
하염이 없다가 문득 죽을 만큼 지루해졌는데
그때는 참으로 무섭고 서늘했네
미류강에 쏟아붓고 떠내려 보내도
짧은 청춘이 겁처럼 머나멀기만 했네
끝내는 죽는 게 나을 만큼 까마득했는가
어느날 네가 우두커니 창밖을 향해
저것은 미류가 아니라 미루,라며
악기를 부수고 호흡을 버리는 순간
캄캄하게 창이 깨지고 은하수는 꺼지네
흐르던 나무는 흐느끼네
물 위로 부패한 음들이 둥둥 떠오르고
나는 목이 메어 울음도 없네
잦아드는 불길에 너를 뿌리면
목을 매단 음악이 가루로 흩어지네
이 또한 너의 입술에서 비롯되었으나
흐르는 흐르고 있는 것은
미루가 아니라네 잿더미에 버려져도
미류, 미류—라네
떠도는 손
김경언 형에게
멈추면 밀어주고 싶은 것들이 있다
오래 줄 서서 그네를 타는 함성은
아이의 꿈속까지 따라간다
높게 흔들릴수록 잠꼬대는 환호성이다
멈춰서도 흔들리는 것들,
사채에 쫓기는 가장의 주먹은
유서를 찢는 여고생의 흰 손은
낮게 흔들리며 그네에 남아 있다
흔들리면 붙잡고 싶은 것,
첫 키스의 여운이 길게 앉았다 간 그곳에
이별을 앞둔 저주가 짧게 머문다
치매요양원을 검색하다 말고
예순의 며느리는 힘주어 그네줄을 잡는다
붙들어도 흔들리는 것이 있다
아주 많이 흔들렸으므로
쉽게 붙잡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너무 오래 흔들려왔으므로
놓아주고 싶은 것들,
해는 저물고 어김없이 시작하는 새해
잠 못 드는 연휴 지나
구년째 의식이 없는 병실에 간다
궤도를 잃은 유성처럼 흔들리는
그 눈빛에 안부를 물어야 한다
촛불을 대신 끄고 손뼉 치며
생일을 축하해야 한다
늘 웃는 얼굴인 그가 크게 웃으면
모두가 환해지던 때가 있었다,
놔주기에는 아직 힘주어 따뜻한
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