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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선영 李宣姈
1964년 서울 출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 가엾은 비눗갑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평범에 바치다』 『일찍 늙으매 꽃꿈』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하우부리 쇠똥구리』 등이 있음. 07sylee@hanmail.net
그의 노후
반쪽 뇌가 두꺼비집을 내려버리자
수평이 된 그가 되찾은 건 배내옷 속의 환하고 해맑은 웃음이었네
반쪽의 뇌와 함께 안팎에서 어지럽게 거미줄 치던 언어들이 사라지고
그 안에 걸려들었던 잡념의 먹잇감들도 더이상 버둥거리지 않았다네
이부자리에 누워서 그가 예전 습관처럼 열심히 넘겨가며 보는 신문에는
어떤 기억과 일상의 삽화들이 상형문자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평생이 숫자와 자리와 잘잘못을 가리는 싸움이었던 그가 이제야
먹을 자리 눌 자리, 낼 거 받을 거, 니 잘못 내 잘못 가리지 않고 한가롭다네
반쪽 뇌의 먹구름 걷히자 서둘러 길을 여는 햇살!
겹겹이 주름진 뇌는 그간 얼마나 많은 번개와 천둥을 일게 한 것인가
자기 안에 있는 빛을 보지 못하고 그는 어떤 뜨내기 태양을 찾아 두리번거렸는지
그 비좁은 머릿속에 들어앉은 뇌는, 익어갈수록 달궈지는 찜솥마냥, 습하고 뜨거워지는데
혼자서는 식힐 줄 몰라 오래도록 남몰래 뒤척였구나
집
남은 집은 몇채이려나, 나 여러채의 집들을 거쳐왔네
크거니 작거니 높거니 낮거니 했지만
들어앉으면 달리 나설 데도 없는 나의 집이었다네
옥상에서 별을 올려다보던 집
계몽사 50권 세계동화전집이 반겨주던 집
할아버지가 벼루에 먹을 갈아 다리 가는 학을 그리던 방이 있던 집
할머니가 큰솥에 개떡을 찌던 부엌이 있던 집
키우던 고양이가 갓 낳은 새끼들을 숨기려다 목줄에 걸려 죽고
나는 멍하니 창틀에 올라앉아 마당의 후박나무만 바라보던 집
저녁 어스름 귀갓길에 문득 노을빛 조등이 걸렸던 집
아버지에게 대들다 한동안 치마 아래로 종아리가 시퍼렇던 여대생이 살던 집
후두둑 빨간 딱지가 붙고 빚쟁이로 몇날 며칠 눅눅하던 집
퇴직하고 이빨 빠진 아버지가 낡은 소파와 함께 음침한 정물화가 되어가던 집
그 집이 싫어서 한 남자와 도망쳐 나온 집
커다란 모기장을 사면 벽에 걸고 아이들과 한방에서 자던 집
아이들이 자라면서 식탁이 소란스러워지고
기어코 같이 놓일 수 없게 된 수저들이 생긴 집
네 식구가 제 귀퉁이에서 각자 자기 식의 평화를 지키는 집
때로 네 식구 마음 따라 문짝은 어그러지고 변기가 막히고 천장이 얼룩지는 집
제 손바닥에 옹송그리는 식구들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지상의 단 한칸
어쩌다 예전 살던 곳들을 지나칠 때면
어떤 집은 뭐하러 또 왔냐 묻고 어떤 집은 들렀다 가라 하는데
제 들보를 갉아먹는 슬픈 벌레를 키우지 않는 집은 어디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