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리뷰
문학과 현실의 다리
김녕 金寧
문학평론가. cruciris@naver.com
현실과 치안의 논리에 압도당할 때엔 그로부터 자율적인 영토를, 삶과 유리되어 있음을 자각할 때에는 정치성과 참여를, 전체만이 중요해진 때엔 지워진 개인을, 흩어진 개인들만이 남았을 때엔 공동체와 연대를 상상해온 것.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누군가는 문학이라고, 또 누군가는 시민이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쪽을 답이 아니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문학을 향유하는 독자이거나 창작자인 동시에 시민이다.
그러나 한편 ‘문학’과 ‘사회’, 양자의 분열은 현실이기도 하다. 의외로 문학 텍스트와 사회현실의 지형을 겹쳐놓고 함께 인식할 기회는 흔치 않다. 아주 시의적인 문학을 만나거나, 아주 충격적인 사건을 만나지 않는 이상은. 그런 의미에서 『창작과비평』의 역할은 종요롭다. ‘창작’과 ‘비평’ 그리고 ‘현장’과 ‘논단’. 각각의 내용은 개별적일지언정, 전체를 횡단하다보면 자연스레 ‘문학’과 ‘사회’라는 두 항 사이에 다리가 놓이곤 한다. 지난호에는 두 항의 관계 속에서 고투하는 글들이 많이 보였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특집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과 소설들이었다.
특집에서 백지연은 페미니즘 비평의 공회전에 차이를 기입하기 위해 어떻게 새롭고 실천적으로 읽을 것인지를 탐색한다. 그 통로로 김승옥 소설의 여성인물을 그저 소비·삭제된 존재로 도식화하기를 거부하고, 60년대의 도시성과 길항하는 입체적 존재로 다시 읽어내는 대목은 이 글의 백미다. 페미니즘 담론이 허를 찌르는 비판적 재전유로 생산성과 실천성을 담보해왔거니와, 문제는 단순히 어떤 작품에 여성혐오 낙인을 찍는 판관의 노릇이 아닌 것이다. 다만 김애란의 「가리는 손」 읽기에서 ‘혐오 아카이브’ 논의를 더 맛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차미령은 퀴어를 테마로 동시대 소설에 접근한다. 논자의 활용대로 현장의 퀴어는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라는 구호를 앞세워 그 의미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넓어진 퀴어의 외연에는 성별도 성적 지향도 인종도 계급도 세대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 글이 일별하는 소설들의 가시적인 소재가 모두 게이·레즈비언인 점은 아쉽지만, 정체성을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너’를 어느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성찰”하는 감각일 것이다. 어떤 범주에 ‘너’를 함부로 구속하지 않고, ‘너’로서 존중하고자 애쓰는 이 감각이야말로 퀴어적인 것일 테니.
김수이의 글은 황병승과 ‘탈선’으로부터 ‘부작용’을 길어 올리고, 근미래와 ‘탈선’ 등의 현실과 함께 2000년대의 시들과 최근의 김승일을 통해 페미니즘의 흐름을 짚는다. 특집의 세 글 중에서 문학과 현실이 가장 거칠게 마찰하는 듯했고 그래서인지 ‘부작용’의 쓰임이 균일하지 않은 감이 있지만, 당면한 현실의 맥락에서 당면한 문학을 읽어내는 목소리의 치열함은 그 자체로 ‘부작용’을 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소설은 구병모·김인숙·정용준의 작품이 실렸다. 먼저 구병모는 정치적 올바름과 혐오의 거리를 묻는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폭력적인지를 가독성 높고 속도감 있는 필치로 그려낸다. 작중의 소설가 P씨와 서술자 ‘나’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겹쳐지고 ‘피씨주의자’를 P씨로 볼 것인지 SNS상의 비난자들로 볼 것인지 등 다양하게 읽을 가능성을 가진 작품이었다. 다만 비판자들의 올바르지 않은 면모가 과히 묘사된 탓에 평면적인 ‘메시지’만 강조되는 뉘앙스는 아쉽다.
정용준의 작품은 앞선 구병모의 작품과 세부 테마는 다르지만, 정죄(定罪)라는 관점에서 묶어 읽어볼 만하다. 괴물을 낳는 것은 무엇인가. 괴물이 먼저 있고 심판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아니면 괴물로 호명하고 정죄하는 목소리들이 괴물을 만드는가. 우리는 왜 심판 그 자체에 열광하는가. 차별과 혐오 문제와 더불어 천착해볼 만한 질문을 건네는 소설인데, 작가 특유의 장르적 상상력에 기반한 전개 과정에서 해영·닥터 한·서준 등의 인물들이 충분히 제시·해명되지는 못한 듯싶다.
한편 김인숙의 작품은 “너무 별 볼 일 없어서, 산불 하나 본 게 그리 대단”(231면)한 초라한 가장에 대한 초상이다. 그가 자신을 ‘사소한 히어로’로 상상하며 현재를 견디는 모습은 우습고도 서글픈데, 화자 자신이 달콤한 ‘꿈’에 빠져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음이 고백되는 순간 일면 서늘해진다. 그가 자족적인 꿈을 지속시킬지 아니면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바꿀지, 이 소설은 결론을 내주지 않는다. 인물에 몰입시키면서도 그에게 면죄부는 주지 않으며, 결말을 열어두는 균형감을 갖춘 단단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고 논할 때 종종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소설이 왜 지금 나와야 했는가, 혹은 이 소설이 몇년 후에도 읽힐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 여기에는 ‘오늘을 바꿀 문학’과 ‘백년 뒤에도 남을 문학’이라는 두 상이 있다. 이들은 서로 무관한 다른 지평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그러나 창비가 다리를 놓고 있는 두 항이 그렇듯, 저 둘 역시 영 다른 꿈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