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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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金尙美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등이 있음. ksmnabi@hanmail.net

 

 

 

문어탕

 

 

연포탕과 비슷한 문어탕을 먹는다

문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중 생물

무수한 빨판이 박힌 여덟개의 통통한 다리와 둥근 몸통 하나

문어 그림으로 미술상을 받은 적 있듯이

문어는 너무나 단순해서 그리기도 쉽다

다른 아이들은 징그럽다고 잘 그리지 않는 문어를

나는 새보다도 고양이보다도 더 잘 그린다

언젠가 바위틈에 꽉 붙어 있는 어린 문어를 잡은 적이 있다

그 축축하고 놀라운 빨판의 힘에 놀라

다시 바닷속으로 풍덩 던져버렸지만

그때의 그 촉감, 그 흡착력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게 안간힘이라는 걸까?

처음엔 나도 외계인 같은 문어가 무섭고 징그러웠지만

어떤 식으로든 한번 살려준 것들은 깊은 여운을 남기는 법

그 이후로 나는 문어가 좋아졌다

제사상에 오른 마른 문어는 언제나 내 몫이듯

문어는 오징어보다 낙지보다 주꾸미보다 훨씬 더 식감이 두툼하고 맛있다

그런 문어를 왜 구약성서 레위기에선 부정한 짐승이라 하고

북유럽 쪽 사람들은 악마의 물고기라고 했을까?

단지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싸잡아 폄하해도 되나?

나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어도 그들이 혐오스럽지 않다

문어, 오징어, 뱀장어, 가오리, 해삼, 멍게, 개불, 굴 등등

싱싱한 바다 냄새 나는 것이라면 무조건 다 좋다

그중 문어가 더 정이 가고 좋은 건

문어는 아주 짧게 산다는 것

그리고 평생 한 문어와 딱 한번 격렬하게 짝짓기한 후

새끼들을 보기도 전에 죽어버린다는 것

그래서 가족 개념이 없다는 것

머리가 아주 좋고 피부가 색소체로 되어 있어

움직일 때마다 색색의 불꽃놀이를 펼쳐 보여준다는 것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처럼 맹랑하게 생겼음에도

물속에서 몸을 쭉 펴고 있을 땐

마치 춤추며 흩날리는 꽃잎처럼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것

그보다 더 좋은 건 줄행랑을 칠 때마다 내뿜는 새카만 먹물!

언젠가는 그 먹물들을 모아 잉크로 사용하면

틀림없이 새카만 밤, 새카만 구름이라는 멋진 시가 탄생할 거야

그런 꿈같은 망상에 해롱해롱 젖으며

연포탕을 닮은 문어탕을 먹는다

잔인할 정도로 쫄깃쫄깃 맛나게 꼭꼭 씹어 삼킨다

 

 

 

시인 앨범 7

오늘의 일기

 

 

어떤 시는 참 불편하고 읽기가 싫다 힘이 든다

한때는 나와 친했던 시인이 쓴 시인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시인은 한번도 나와 친한 적 없다고 말하고 다닌다는데

그 말 듣고 어찌나 반갑던지

그럼 이제 나도 그 시인과 모르는 사이가 되어도 좋겠네

눈물 콧물 흘리며 도와달라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그 시인에게 몇번이나 얻어맞은 내 뒤통수 보여주며

이제는 너도 네 힘으로 잘 견뎌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해도 되겠네

이제는 마음 약하게 그 거짓술수에 넘어가지 않아도 되겠네

그 시인이 빌려간 돈도 그만큼 공유한 내 우정도

이제는 내 것 아니라 생각하니 그리 크게 아깝지도 않네

그래도 마음은 참 아프네

유통기한 한참 지난 우유를 마신 것처럼 배 속이 쓰리네

하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생각하니

아주 홀가분하고 무관무심해지네

오늘밤은 두 다리 쭉 뻗고 소금물로 깨끗이 목욕재계하고

멍든 뒤통수의 혹들도 모두 하수구로 흘려보내고

새하얀 종이 위에 오늘의 일기나 쓰자

내 시는 모든 상처와 영혼과 육신이 충돌한 흔적

그곳에 사는 시인은 단 두 유형뿐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하느님이 보시기엔 둘 다 온 정성을 다해 만든 피조물

그 차이를 알아내는 건 오로지 본인들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