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김이강

1982년 전남 여수 출생. 2006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등이 있음. isall@naver.com

 

 

 

등대로

 

 

성훈이가 걸어간 길을 잊을 수 없다. 가벼운 그 애가 나를 업고 걸었던 길. 모래사장은 없고 부두만 이어지는 바닷가 마을. 그가 말했다. 면접관이 키틀러를 히틀러로 오해했어. 키틀러를? 히틀러로? 말도 안 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관을 내가 죽여줄까? 그가 웃는다. 정말이야. 응? 말해봐, 너의 말. 그가 웃는다. 나는 그의 등에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웃음은 어떤 것일까. 그러나 내려가지 못한 채 바다가 멀어지고 있다.

 

성훈이가 걸어간 길을 잊을 수 없다. 나래의 생일 꽃다발을 들고 있던 날. 나래의 엄마가 된 정은이의 손을 잡고 오래 멈추어 있던 길. 벚꽃이 지려나봐.

나래 나래 하며 걷는다. 그가 말한다. 나래 나래. 내가 말한다. 나래 나래. 그의 어깨에서 정은이의 머리칼 향기가 나래의 향에 섞여 들어온다. 눈길에 후드득 떨어진다. 그런 것을 사람들이 오래 바라본다.

 

사람들이 오래 바라보는 일을 잊을 수 없다고 그가 말한다. 그가 나를 업고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길. 결국 면접관을 죽이러 가게 될 것이다. 면접관이 피 흘릴 것이다. 돌을 매달아 멀리 던져버리자. 그가 웃는다. 부두에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칼이 성훈이를 자꾸만 간질인다. 그가 웃는다. 가벼운 그 애의 등에 대고 말한다. 그러자 그도 말한다. 바다가 넓어지고 있다.

 

 

 

고릴라와 함께

 

 

극장 문은 열려 있고

고릴라 한마리 한가운데 앉아 있다

 

지겹고 졸린 영화를

고릴라와 내가 본다

 

고릴라의 털에서

튤립 향이 난다

 

튤립이 아니고 국화요.

국화요? 아닌데요. 분명히 국화는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린 서로를 바라본다 스크린 속에서는 인명 구조대원이 하루 종일 높은 곳에 앉아서 책을 읽는데 잠시 들어온 극장에서 우리가 왜 이럴까

 

그러오?

네. 아니요. 국화일 수도 있고요.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소.

 

나도 모르겠소

자꾸 발음해본다

나도 모르겠소

그런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가 날 보고 엷게 웃는다

양지바른 곳이란 어떤 걸까요? 당신도 아직 모르겠군요. 생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어떻게 퇴장하나요? 네 발로? 아니면 지팡이를 짚고? 어디로 가나요. 제가 좋은 바를 알고 있어요. 거기 사장님이 선곡을 끝내주게……

 

그러자 고릴라

한 손으로 내 한 손을 잡고

바람 부는 스크린을 가리킨다

 

우리 모두가 알던 불빛 같은 것이 반짝인다

 

정말로, 정말로 모두가 알까?

 

고릴라와 함께

끝없이 올라가는 크레딧을 바라보는 일

 

정말로

그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