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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상학 安相學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등이 있음. artandong@hanmail.net
화산도(火山島)
4·3, 일흔번째 봄날
세상 모든 슬픔의 출처는 사랑이다
사랑이 형체를 잃어가는 꼭 그만큼 슬픔이 생겨난다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면 슬픔은 완벽하게 나타난다
화산도의 봄날 어디서라도 증명사진처럼 볼 수 있다
사랑을 잃은 유채꽃은 붉게 피어선 진다
어떤 사랑은 이별할 시간도 없이 한 구덩이에 묻혔다
사랑을 잃은 동백꽃은 잎이 없는 가지에서 피어선 진다
어떤 사랑은 죽음으로써 아이를 살려 품은 품 안에서 이별했다
화산도는 땅과 바다가 단 한번 사랑으로 피었다가
아직 꽃잎 지는 중이다 오래도록 꽃잎 지는
이 섬에서는 사람의 사랑도 한번 지면
오래오래 앓으면서 꽃잎 지는 현재진행형이 된다
어떤 꽃은 일흔번의 봄을 갈아엎고도
여태 사랑을 잃은 꽃잎으로 지고 있다
갈라질 수 없는 섬 흩어질 수 없는 섬
갈라서지 말자고 흩트리지 말자고 가슴을 내걸었다가
사랑을 잃은 영혼들이 저렇듯 온통 꽃잎으로 지는 중이다
모든 슬픔의 출처는 사랑이다, 슬픔을 되돌려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 된 땅에 꽃잎 지고 싶은 원혼들이
여태 떠돌며 난분분 지는 중이다, 그렇다고
다만 무작정 지는 것만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예토를 되돌려 노란 꽃은 노랗게 붉은 꽃은 붉게 필
그날의 대지 위로 꽃잎 나부끼며 여태, 아직, 지는 중이다
머지않아 사뿐히도 내려앉아
온 섬을 뒤덮고야 말 꽃잎, 꽃잎들
세상 모든 슬픔의 환지본처 사랑에게로 목하 지는 중이다
맑은 땅에 닿을 날 실로 머지않았다
빌뱅이 언덕 권정생 새집
별 보는 산 빌배산에서도 가장 낮은 언덕이어서
가장 먼 별을 올려다보는 빌뱅이 언덕
그 산 그 언덕이 바람막이 선
버들치 시냇가 옴팡진 땅 오막살이집 한칸
그보다 더 높은 집은 상여를 넣어두는 곳집
그보다 더 낮은 집은 강아지들이 거쳐갔던 집
그사이 바람벽 어디쯤 노랑딱새가 살던 집
세상 가장 낮은 빌뱅이 언덕에서도 내려다봐야 하는
앵두나무와 키 재며 선 오막살이집 한칸
집주인에게는 그 언덕이 세상 가장 높은 하늘이었다
일흔 생애 끝 그는 가장 현실적인 하늘로 돌아갔다
빌뱅이 언덕에 뿌려진 뼛가루 권정생 별자리 그의 새집
지붕도 바람벽도 담도 울도 없는 오막살이집 한칸
가장 낮은 언덕이 그에게는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