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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재일 河在一
1962년 충남 보령 출생. 1984년 『불교사상』으로 등단. 시집 『동네 한 바퀴』 『코딩』 등이 있음. tatar38@naver.com
신의 사자(使者)들
사나흘 굶다 한끼만 먹어보자.
외진 산밭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흰 눈 사이로 잠깐 귀 열고 올라서는 싹들이 어여쁘다.
서릿발 깨고 뿌리째 뽑아 엄동에 보리싹을 먹어보자.
대륙을 건너온 관절을 잠시 접고서 앉는다.
그때 수상한 볏짚이 나타난다.
입맛 나는 벼이삭 줄기를 찾은 기러기떼.
이삭이 나타나자 눈보라는 새떼의 의심을 지우려고 몰아친다.
조각도로 어둠을 베어내어 나락 사이에 화약을 쟁인 다음
촛농을 떨어뜨려 접착하면 소년은 고기를 얻을 수 있을까.
논에서 개흙을 퍼다 미끼에 바르며
북방에서 온 한겨울 진객을 속이는 일이야말로,
영장류가 도처에 숨겨놓은 함정인 것을.
폭설이 들이닥친 설경 한 페이지.
도래솔 근처 솔가리에 묻혀 있던 깃털이 반짝인다.
‘그날 너희들 중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해마다 산천에 봄이 오면 춘란(春蘭)으로 피었다.’
광목천 펼치고 가는 한줄기 새떼.
경계 없는 나라 스키타이로 가는 신의 사자들.
꽃게의 장례(葬禮)
복사꽃이 피고 햇살이 무시로 황홀한 날이다. 제 부챗살 활활 젓는 꽃게가 바다에서 떼거리로 떠다닌다. 세상의 수많은 열기구와 풍선들도 허공에 떠다닌다. 배경은 보리누름에 우럭 솥 깨지는 섬마을이다. 나는 포구에서 건져 올린 꽃게를 한 바구니 들고 살강이 있는 암실(暗室)로 입장한다.
흐르는 물을 받아 화장기 번진 꽃게를 일단 칫솔로 구석구석 씻어주렴. 다리에 모래가 많이 끼어 있으니 신경 써서 처리하고 물기를 닦아 한쪽 소쿠리에 담아두렴. 가위를 사용해 꼬리 부분과 다리 끝을 잘라 게를 정갈하게 다듬어놓으렴. 등딱지를 떼어낸 후 몸통 위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입과 몰래 감춰둔 모래주머니를 칼로 조심스럽게 분리해내야 한다. 이쯤에서 꽃게는 제 살던 골목길을 그리워할 것이다. 잠시 후 여러겹 붙어 있는 아가미사슬을 식가위로 제거해주렴. 게의 몸통을 가르면 속에서 크림치즈 노을이 와르르 쏟아질 거야. 소문이 퍼지기 전 재빨리 대접에 따로 받아서 모아두렴.
아직도 탄력을 유지한 기억이 몸통에 그대로 붙어 있다면 생물은 통증을 느낄 테니 달리 타이를 말이 있겠니? 이제 서서히 꽃게는 바다 밑 골목과 상점을 잊을 것이다. 즉시 몸통을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나누어주렴. 녹슨 가위로 자른다면 살이 밖으로 넘치게 될 터이니, 방금 숫돌에 간 예리한 도끼로 번개처럼 내리쳐 숨을 끊어주렴. 탕으로 요리하려면 네토막 정도로 잘라야 한다. 아삭한 게장을 담글 경우라면 배꼽이 하늘을 향하도록 항아리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요령은 필수. 그래야 간장을 부었을 때 창자가 녹아서 내용에 흘러들지 않고 몸속에 웅크린 붉은 산호가 문을 활짝 열고 웃게 되는 것이다.
국물이 텁텁해요. 당신은 한마디쯤 불평을 지를 것이다. 장을 많이 넣어서 순한 혀가 시간의 무게를 약간 느꼈을지도 모르니까. 된장은 비린내만 살짝 없앨 정도로 넣어 꽃게 본래의 천성을 살려주는 게 좋지. 혹시 잡내가 난다면 추억을 우린 물에 게를 약간 담가놓으면 고민이 해결된다. 꽃게는 성품이 어진 까닭에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한 양념을 붉은 폐 속 깊이깊이 잘도 받아들인단다. 이제 잠에서 깨어난 꽃게가 사방팔방 감칠맛 나는 거품을 대롱으로 비눗방울처럼 솔솔 불기 시작할 때다.
쪽빛 바다에 새봄이 오면 집집마다 꽃게의 만장(輓章)이 펄럭이리. 꽃게가 걸터앉아 섬과 섬을 이어주던 무지개다리가 사리처럼 바람에 흩어지리. 세상에 태어난 존재의 이름값을 정작 떠오르게 할 터이다.
굿바이! 꽃게야.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태초의 바다로 귀향하는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