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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시하 朴時夏
1972년 서울 출생. 2008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눈사람의 사회』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등이 있음. lrumr72@naver.com
사슴
사슴이 죽어가고 있다.
죽으면 안 돼.
사슴! 안 돼!
달려간다,
사슴을 살려야 한다.
그 삶이 끝나면 안 된다.
사슴은 쓰러져
숨을 쉬지 않는다.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른다.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숨을 쉬어 제발
내 숨을 불어넣어줄게……
입이 보이지 않는다.
입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뿔도 보이지 않는다.
사슴은 보이지 않고
내가 죽는다.
내 심장이 멈춘다.
내 가슴에 보드라운 흰 털이 있고
머리에 단단한 뿔이 있어.
사슴입니까,
안타까운 사랑입니까.
깊이 숨을 들이쉰다.
사슴 냄새가 난다.
물고기
우리는 꿈의 재료야,
우리네 삶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고 말야.
—셰익스피어
검은 물고기 두마리를 샀다.
국적 없는 야시장에서
매끄럽고 긴 물고기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걸 사도 되는 건지……
가진 돈도 없는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상인이 그것을 주었다.
봉투에 펄떡거리는 물고기들이 담겼다.
값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물고기 두마리를 들고 있었다.
길을 알려주던 사람은 가고 없었다.
물고기 따위를 사다니
그렇게 젖고 더러운 걸 들고 있다니.
비난하는 표정으로 떠나버렸다.
야시장에는 비가 내렸고
발이 축축해졌다.
물고기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탄생과 죽음은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 되어버린 죄.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같이 생생한
무섭고 큰 존재.
기차역을 찾아갔지만
집으로 가는 기차는 끊겨 있었고
누구도 물고기를 맡아주지 않았다.
그것을 들고 긴 철로를 걸었다.
어둡고 좁은 통로.
빛이 들지 않았으나
길은 이어져 있었다.
비로소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