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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등이 있음. oblako@hanmail.net
누구의 토끼 뿔
누구에게 나는 자꾸
질문을 했다.
누구세요. 누구일까요. 누구는 왜
조금씩 어긋나는 것일까요.
내가 누구를 만나 담소를 나눌 때 누구는 꼭
토끼의 뿔을 달고 있었다.
토끼의 뿔을 휘휘 휘두르며 친근감을 표시하다가 의혹을 드러내다가 결연히 싸우다가 끝내
이별을
누구는 조금씩 이상해 보이는 데는 천재
누구세요. 누구일까요. 대체 넌 누구냐.
궁금해서 알 수 없어서 점점 괴로워져서 질문을
그것이 쓸쓸하고 좁고 가족 같은 동굴이어서
나는 밤마다 누구의 토끼 뿔을 붙잡고 누구의 캄캄한 아가리를 벌리고 누구의 내장 속으로
누구의 악몽까지
도달하려고 했다.
이제 누구는 나의 번민과 나의 의혹과 나의 사랑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나는 누구의 무엇도 누구의 어떤 것도
추억으로 만들지 않았는데
누구가 떠난 뒤에도 나는
토끼의 뿔을 생각하였다. 토끼의 뿔에 사로잡혔다. 토끼의 뿔을 열심히 키워서
팔지 않았다.
비 내리는 밤마다
누구에게 나는 조용히 물어보았다.
우리의 사랑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지를
왜 내 머리에서 토끼의 뿔이 자꾸 돋아나는지를
누구는 길고 아름다운 뿔을 휘휘 휘두르며 오늘도
가깝고도 먼 곳에서 조금씩
나를 그리워하는데
양을 세는 노인
노인은 한마리의 양을 위해 일생을 보냈대.
그 한마리가 더 귀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길을 잃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낯익고 익숙해서 울고 있는 사람이 되었네. 그 한마리의 양이
노인의 삶에 유일한 빛이었기 때문에
양 한마리는 사실 양 한마리,
양 한마리는 끝내 양 한마리, 양 한마리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지. 길을 찾았는데도
길이 이토록 환히 밝혀져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 이미 길이었는데도
메에에……가 아니라 이상한 소리로 우는 양의 밤은 그렇게 온다. 과아아……라든가 요우우……라고 울고 있는 양의 밤은 그렇게
노인으로서는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지.
여보, 나는 아흔아홉개의 불안에 빠진 것 같아.
여보, 나는 하나뿐인 길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아.
한마리 두마리 아홉마리 아흔아홉마리…… 노인은 양을 세다가 양을 세다가 양을 세다가
잠이 들었네. 꿈속의 양 한마리는 처음 보는 양 한마리
무서운 양 한마리
여보, 오늘은 저기 저 언덕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보자. 메에에……가 아니라
키이이…… 이상한 소리로 우는 양을 따라서
단 한마리의 양을 따라서
명랑한 양치기 개가
노인과 함께 석양 아래를 걸어갔다.
러시아워의 횡단보도를 건너서
잃어버린 길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