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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성룡 『건축과 풍화』, 수류산방 2018
도시의 품위있는 노화를 위하여
정헌목 鄭憲穆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전공 교수 devius@aks.ac.kr
한강 선유도공원은 역사와 공간,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채 현대도시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잘 보여주는 장소다. 용도 폐기가 결정된 과거의 정수장을 재활용해 지은 선유도공원은 국내 최초의 환경재생 생태공원으로, 낡은 시설물과 수생식물원, 정원 등이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평일 저녁과 주말마다 나들이 나온 가족과 연인으로 붐비는 이 공원은 시민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여가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도시 인프라의 가장 성공적인 재활용 사례로 꼽히는 선유도공원의 대표설계자가 바로 건축가 조성룡이다.
도시를 분석하는 인류학자의 입장에서, 다른 연구자나 비평가의 해석을 넘어 공간의 생산과 활용에 직접 관여한 여러 행위자들의 이야기를 청취하는 건 언제나 귀한 경험이다. 한국 건축계의 거장 조성룡의 『건축과 풍화: 우리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심세중 엮음)은 그런 경험을 만끽하기에 충분한 책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다듬어내는 주인공은 물론 보통의 시민일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다른 차원의 주요 행위자로 꼽아야 할 것이 전문가 집단의 일원인 건축가이다. 이들은 정책을 제시하고 집행하는 정치가나 담당 공무원 등과 함께 도시의 경관과 구조를 만드는 데 관여한다. 조성룡은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굵직굵직한 도시건축 현장 곳곳에 직접 참여해온 원로 건축가이지만, 그의 결과물은 주로 오래된 건물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에 집중되어왔다. 자신의 작업을 구술의 형태를 취해 소개하는 책인 『건축과 풍화』는 건축의 공공성과 주거의 본질에서부터 도시재생 등 최근의 주요 화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책에서 방점이 찍힌 건 제목에도 담긴 ‘풍화(風化)’다. 풍화란 본래 지표를 이루는 바위나 돌이 햇빛, 공기, 물 따위의 작용으로 점차 파괴되고 부서지는 자연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풍화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건 건축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과거부터 건축 재료로 쓰여온 돌과 벽돌, 나무 등은 풍화 과정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가는 반면, 콘크리트나 철근 등 근대 이후 공장에서 생산된 재료들은 자연에서 쉽게 변형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결국 세월이 흘러 기능을 다하고 보기에도 흉해진 낡은 건물을 두고 인간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기존의 건물을 아예 부수어버리고 새 건물을 다시 짓거나, 쓸모가 다한 공간이 주변 경관과 자연스레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살려내어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 지금까지 조성룡이 작업해왔고, 또 선호해온 선택지는 물론 후자다.
“건축이라는 것이 쓸모가 끝났을 때, 또는 기능이나 조건이 바뀌었을 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새로 쓸 수 있는 부분만 살리고, 그다음에는 이것을 풍화되는 과정 속에 두자는 거죠.”(179면) 선유도공원도 그렇고(원고의 바탕이 된 ‘웹진 민연’의 연재 사정으로 선유도공원 이야기는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인 소마미술관이나 어린이대공원 꿈마루도 그렇고, 조성룡의 해법은 어떻게 하면 쓰임이 다한 건물에 ‘품위있는 풍화’의 운명을 부여하고 사회적 공공성과 연결시킬 것인가에 맞닿아 있다. 40여년에 걸친 건축가로서의 경력 동안 그의 관심은 건축의 공공성이 자연과 지형, 그리고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역사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내는 방식을 향했다. 이를 둘러싼 건축가의 치열한 고민은 이 책에서 여덟편으로 나누어 소개된, 그가 진행해온 작업들과 관련한 구술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소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서울역 고가와 이화마을 재정비 등 여러 사정으로 실제 현실화되지 않은 프로젝트들을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2015년 발표된 서울역 고가 활용 프로젝트를 위해 조성룡은 각계각층의 전문가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진행했고, 그 과정은 한 장을 할애하여 상세히 소개된다. 엔지니어와 조경전문가뿐 아니라 작가와 예술가,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자들을 포함한 공론장이 구성되었고, 남대문시장 상인과 오토바이 운전사 등 주변 공간에서 생업을 영위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더 나은 설계안의 도출을 위해 취합되었다. 이처럼 시민참여를 바탕으로 한 계획 과정은 도시의 공공공간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위한 하나의 실험적 시도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책에서 소개된 조성룡의 구상들이 현실화되었다면 서울역 고가차도는 공중수목원을 표방한 지금의 ‘서울로7017’이 아니라 ‘서울역 고가: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테고, 이화마을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벽화를 두고 주민과 행정 간의 다툼이 이어지는 갈등의 공간이 아니라 서울성곽의 경관과 어우러져 새로 조성된 주거단지로 탈바꿈했을 터이다. 물론 건축가가 구상한 계획 단계의 이상이 실행 이후 현실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을지는 예단하기 힘든 영역의 문제이다. 중요한 건 관료주의적 행정과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를 넘어 도시공간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과 시도들이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다는 것이며, 한 원로 건축가의 구술을 통해 그에 대한 단초를 모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소하지만 책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은데, 특히 구성과 편집이 그러하다. 이를테면 각종 도면과 사진이 왼쪽 면을 채우고 저자의 구술이 오른쪽 면을 채우는 구성에서, 왼편의 이미지가 너무 작아 보기 힘든 경우가 때때로 눈에 띈다. 또 소개된 도면을 부연하면서 색으로 표시된 부분을 참고하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모든 사진이 흑백으로 실려 있어 해당 부분을 찾기 어렵다는 점도 다소 아쉽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이런 사소한 단점을 덮을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최근 들어 도시공간을 공공의 관점에서 보는 입장과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사유재산으로 인식하는 입장 간의 충돌 사례를 심심찮게 목격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원로 건축가 중 하나인 조성룡이 지난 수십년 동안 겪어온 경험과 고민은 그 자체로 소중한 자산이다. 자본의 논리가 주를 이루어온 재개발에서 사람과 장소 중심의 도시재생으로 패러다임 변화가 불가피한 지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