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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은지
1985년 서울 출생.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onepiece_27@naver.com
횡단열차
왼쪽 창문이 마을과 사과밭, 갈대숲과 작은 폭포를 지나는 동안
오른쪽 창문은 이름 모를 산을 통과하고 있었다
우리는 열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아름다운 창문을 보았다
얼어붙은 강을 모두 지날 때까지
요괴와 요정 중 누가 더 현실적인지 우기다가
요괴의 종류에 대해 들었다
사람을 돕는 요괴, 사람에게 장난치는 요괴, 사람을 해치는 요괴
요괴가 착한 사람도 해쳐?
착한 사람이라니, 착한 사람이라니!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줄 아는 요괴는 사람이 만든 이야기에나 나와
그렇구나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건 나도 어려워
나무와 나무 사이는 철길보다 어두웠으므로
너는 대체 어디서 요괴를 본 거냐고 묻지 못했다
나무를 자세히 봐봐 요괴의 발자국이 보여
질주하는 열차 안에서 대체 뭐가 보이냐는 코웃음에도 너는 진지한 얼굴을 잃지 않았다
나는 자꾸 나무와 나무 사이만 보게 되었는데
우리를 따라오는 요괴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아 겁이 났다
아직 잊지 못한 잘못이 빠른 속도로 뒤따라와 빈자리에 앉았다
왼쪽 창문이 동백군락지 위로 쏟아지는 볕을 지나는 동안
오른쪽 창문은 여전히 이름 모를 산이었다
우리 어디서 내리지? 얼마나 남았지?
너는 아무 대답 없이 오른쪽 창문만 바라보았고
요괴 앞에 늘어놓을 잘못의 종류를 헤아리다 나는 괜히 억울해졌다
터널로 들어서자 양쪽 창문을 가득 채우는 얼굴들
그제야 너는 나를 바라보고 악수를 청했다
아끼는 비밀
무늬가 아름다운 건물을 보았다
천개의 조각이 꼭 맞게 완성된 퍼즐 같기도 하고
스노우볼 안에서 헤엄치는 빛 같기도 했다
손잡고 싶다는 말 대신 무릎이 아프다 했다
왼다리보다 오른다리가 짧아서 그래
오른쪽부터 무너질 거야
걸음을 더 옮겨보니 벽엔 온통 금이었다
이걸 다 세다가는 밤이 모두 지나가겠다
금마다 성실하게 칠해져 있는 페인트
그림자를 밟으며 아끼는 비밀을 꺼내놓는다
다정하게 대해달라는 말 대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약속하며
물빛을 칠한 비밀을 꺼내놓는다
비밀을 들고 달아나는 사람이 많았어
다들 잘 살고 있으면 됐어 괜찮아
매번 다른 색을 칠해놓았으니까
어느 비밀이 진짜 비밀인지 아무도 모르겠지
그럼 그건 아직도 나의 비밀일까
금이 깊어지면 틈이 된다
틈이 깊어지면 그 사이로 손을 넣을 수도 있다
죽은 잠자리를 꺼낼 수도 있고 물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
조금 더 긴 왼다리를 잡아 꺼내면 무늬 없는 나도 흘러나올 거야
오른쪽으로 무너진 빛이 뚝뚝 떨어질 수도 있다
그때 너는 어느 쪽에 서 있을래?
온기가 필요하다는 말 대신 노을이 아름답다 감탄하며
우리가 날 수 있다면 노을의 금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변함없이 무너질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