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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정례 崔正禮
1955년 경기 화성 출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Instances』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등이 있음.
ch2222ch@hanmail.net
빛그물
이해와 오해의 무늬
바탕이 무늬를 이기면 야하고 무늬가 바탕을 이기면 겉만 번드르르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본 논어의 구절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를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다. 이해는 오해와 섞인다. 고집스럽게
두마리 수사슴이 싸우다 한마리가 죽는 장면을 보았다. 승리한 사슴은 자기 뿔에 엉켜 매달린 죽은 사슴의 뿔에서 벗어나려고 벗어나려고 머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사자 한마리가 멀찍이 그 몸부림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 장면이 무슨 비유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잠들었는데 잠의 수면 아래위로 흘러가다 떠오르다 다시 흘러가면서
강을 건너는 한 무리 사슴들을 보았다 잠겨 떠가는 관목처럼 사슴의 뿔이 왕의 관처럼 떠내려가는데
천변에 핀 벚나무가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바람도 없이 꽃잎의 무게가 제 무게에 지면서, 꽃잎, 그것도 힘이라고 멋대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떨어진 다음에는 반짝임에 묻혀 흘러가고
그늘과 빛이, 나뭇가지와 사슴의 관이 흔들리면서, 빛과 그림자가 물 위에 빛그물을 짜면서 흐르고 있었다
4분의 3쯤의 능선에서
언덕길 4분의 3쯤 내려오다가
문득 산딸나무 생각하는 것
전에 살던 동네 공원길
거기 4분의 3 능선에 산딸나무 있었다고
이러는 것, 이러는 것은
뭔가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다
지금쯤 산딸나무 꽃 피었겠다
꽃이 아니라 꽃받침 같았던 꽃
산딸나무 없는 아파트 숲에 살면서
그 동네 떠나온 것, 후회하는 것
공허를 옮기는 일이다
슈퍼에 가서 애써 푸른 사과를 찾아내고
그 사과 4등분으로 쪼개면서
그 색깔 그 향기에 손 넣어보며
대신 사과를 먹으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위로의 말을 꺼내는 것
그것도 그렇고
산딸나무 꽃과 사과의 내부가
푸른 기미의 미색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가 산딸나무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어디에든 정붙여보려고
산딸나무 꽃 지나는 것과 사과 쪼개 먹기를
동일시하는 것, 이것은
대책 없는 억지인데
꽃받침이 꽃이 되고
잎이 꽃받침을 꽃인 줄 알고 받들어 올리고
그래서 꽃받침이 바로 꽃이라고
텅 빈 생각을 피워보려는 것도 그렇고
산의 딸이라서 산딸나무인가봐
그 생각도 말장난일 뿐이고
십자 모양으로 피는 네장의 꽃잎
산딸나무를 사과나무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면
제정신 버리고 넘어가는 것이다
생각의 4분의 3 능선에서 피어나 흔적 없이
사라질 것에 걸려 넘어져서는
이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