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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강지이 姜智伊
1993년 대전 출생.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catontheuniverse@gmail.com
망원경과 없는 사람
그해 여름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한자로 쓰여진 역명, 표지판 너머엔 나무들이 무성했고
엘리베이터를 차례로 타며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의 손끝엔 투명한 붉은빛이 물들고
잠시 왔다 갈 수 있는 마음은 저런 빛이구나
굳이 기다리던 승강기를 보낸 채 캐리어를 끌고 계단으로 내려와 도착한 곳은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끈적하고 볼엔 항상 모기가 물려
붉은 얼굴로 걷게 되는 곳
도색이 벗겨진 플라스틱 망원경을 든 채
아무리 멀리 보려 망원경을 사용해도 바다 끝은 보이질 않아요 그냥 저 멀리는 뿌옇기만 해요 이곳에 와서 무언가 자신을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에요 이미 마음속에 답을 정해두고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곳에서 그 답을 찾은 척한 거죠
도무지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곳으로 돌아오면
너는 바닥에 빌린 책을 펼쳐놓고 자꾸만
빌린 책 중간중간에 투명 테이프를 붙이고
이렇게 좋아하는 책 한 부분을 조명에 비추면 이것도 이렇게,
봐봐 빛이 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근데 그걸 떼어버리는 순간 책이 더럽게 찢어지잖아 글자도 사라져버리고
아무리 말해도 나는 없는 사람이어서 너는 계속 테이프를 붙이고
습기를 먹어 부푸는 책, 점점 가라앉는 캐리어
볼에 달라붙는 모기
계속 얼굴을 긁고
나는 계속 생각했습니다
햇빛은 언제나 너무 뜨겁고
바다의 우울은 어디에서 끝이 나며
도대체
이 여름은 어떻게 끝나는지
저 끝을 볼 수 있는 누군가의 눈동자가 걸어 다닙니다
한 눈 팔기
속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자라나 있었다 기묘하게 뻣뻣한 것이 아무래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길을 다니며 마주치는 동물들에게 인사한 후 그들의 코에 내 속눈썹을 가져다 대었다 개들은 아니라고 했고 그래도 그 속눈썹과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해주었다 고양이들은 갑자기 엉덩이를 가져다 대거나 화를 냈다 인사를 했는데도 저 모양이었다 두더지들은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쥐들은 그냥 가지고 살아 새들은 집에 장식하라고 지금 선물로 보여주는 거니 이제 떼어가면 되니 너구리 오소리 족제비 토끼 만나러 가는 곳마다 통로, 골목, 골목, 나무, 다시 통로, 굴, 골목 크게 걷다가 작게 걷고 위를 보면서 마구 뛰다가 힘을 놓으면 하늘에서도 걷다가 다시 내려와 작은 수풀 통로를 통해 들어가면 작아지고 작아진 채로 끊임없이 수풀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니까 나오는 동그랗고 텅 빈 공간 끝엔 양 갈래 길 그곳에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한쪽 길의 끝을 바라보니 네모반듯한 돌 위의 고양이 그 고양이와 다시 코를 맞추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