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양경언 『안녕을 묻는 방식』, 창비 2019
안녕을 묻기 위한 가만한 걸음
소유정 蘇柔玎
문학평론가 soyujj@naver.com
양경언은 2010년대를 가장 열렬히 읽어온 평론가 중 한명이다. 2011년 처음 평론을 발표하고, 2019년 한권의 비평집을 엮어, 2020년 우리 손에 닿은 이 책에는 한 시대를 돌아보기에 충분할 만큼 2010년대가 촘촘히 담겨 있다. 양경언의 비평 작업은 책의 제목 ‘안녕을 묻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책머리에’에서 그는 “사람들의 안녕을 살피는 일을 문학이 할 때” “비평 역시 문학과 문학작품을 접한 이들 모두의 안부를 묻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7면)를 자문하며, 자신의 글들이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붙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양경언의 비평이 이미 십년간 그러한 역할을 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평론가의 온정 있는 물음을 추적하는 즐거움을 이 책 안에서 충분히 누릴 수 있으리라.
다시 제목에 초점을 두어 그 근원이 2010년대 초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졌던 ‘안녕 대자보’라는 사실에 집중해볼 때,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때와 같이 누군가 우리에게 “안녕들 하십니까?” 묻는다면 긍정적인 답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의미하다고 여겨지는 건 어떤 쪽이라도 대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살피고 말을 고르는 과정과 물음으로 말미암은 관계의 유대이다. 실로 비평이 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비평은 텍스트의 안녕을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동시에 그 안의 수많은 인물들의 안녕을, 그들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안녕을 묻는 것이다. 이는 읽음으로써 그와 더이상 무관할 수 없는 ‘나’와 우리에게 안녕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가 씀으로써 안부를 물을 때 독자는 읽음으로써 그에 감응한다. 비평은 쓰는 이와 읽는 이를 돌아보며 또 하나의 씀으로 다시 정확히 묻고자 한다. ‘안녕’하고 건네는 인사처럼 “서로가 ‘함께 있음’을 실감하는 행위”(7면)로 비평을 수행할 때, 그것은 대자보를 통해 우리가 이미 경험한 적 있듯 다른 물음을 시작하게 하는 한걸음일 수 있다.
그렇게 내디딘 걸음이 닿은 곳은 단지 문학의 자리만이 아니다. 문학과 삶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양경언은 언어가 생성되는 토대이자 우리가 생을 계속하는 장면에 눈길을 두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한 맥락에서 비평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어휘는 ‘현장’이다. 양경언의 비평은 사회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깊은 관심을 두어야 했던 현장의 중심에서 발아한다. 세월호사건,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의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304낭독회’, 그로부터 꾸려진 ‘304femi’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촛불혁명이 이루어졌던 광장과 허물어지는 젠더의 경계선까지. 주목할 것은 나열한 현장이 유기적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점과 그 긴밀한 여러 현장에 우리도 함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양경언의 비평에서 현장은 “동시대성을 감각할 수 있는 장소”(165면)이자, 가장 또렷하게 연대의 기억을 나누었던 장소와 같다. 그곳에서 양경언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와 연대의 마음으로 지금-여기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우리가 더 나은 쪽으로 향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며 쓴다. 이는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지워지는 물음이 아니다. 그는 다시금 지나온 자리를 되짚으며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다시 지금의 ‘여기’와 ‘거기’가 얼마나 같고도 다른지를 살핀다. 그리고 그곳을 맴도는 이가 있다면 그의 궤적을 천천히 따른다.
다루어지는 텍스트에 대한 논의 역시 그의 가만한 걸음과 같다. 양경언은 2010년대의 시를 톺아보며 백상웅 황인찬의 시에서 “가장 일상적인 말로, 혹은 시에서 가장 근원적이라 할 수 있는 ‘나’의 목소리/발화(發話)로 다른 관계의 형성을 요청/대화(對話)”하는 이의 “작은 움직임”을 감지하고(30면), 임승유 안희연 백은선의 시에서는 “오체투지의 몸들”이 “배당된 자리로부터 저 자신의 몸을 떼어내 한발짝 한발짝 움직여나가는 순간”을 상상함으로써 “지금의 세계에 균열을 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65~66면) 그리고 “‘젠더 프레임’을 경유”하는 읽기로 성(性)에 제한적인 읽기가 아닌 경계 너머 읽기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나’라는 주체에 대한 사유를 돕는다. “우리는 시를 통해 어떤 목소리를 듣는가? 그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누구이며, 시를 읽고/쓰는 ‘나’는 누구인가?”(94면) 하는 질문을 돌려주는 방식이다. 이와 같이 2010년대 시에서 시적 주체의 움직임을 읽어내어 싹튼 물음의 끝이 결국 “시를 읽고/쓰는 ‘나’”로 환원되는 것이라면, 양경언은 그 촉을 피하지 않은 채 읽고/쓰는 ‘나’를 견고히 하여 스스로 던진 물음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나’의 이야기는 오직 ‘나’에 의해서만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단 한 사람의 이야기조차도 예사로 지나치지 않는 것. 그와 관계를 맺는 속에서 비로소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158면)이라는 말은 작품 안에서만 가능한 해석이 아니며 읽고/쓰는 ‘나’에게도 유효하다.
양경언이 시에서 “삶다움을 갈구하는 삶”, “삶다움의 가능성을 믿는 삶”(341면)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그의 글에서 그러한 삶에 대한 바람과 계속되는 걸음을 읽어왔다. 혹자는 그의 비평이 현장성에 적극 기대어 있기 때문에 문학 텍스트가 가진 무궁무진한 해석의 가능성을 현장 안에 매몰시킬 것이라 우려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양경언이 제시하는 현장의 개념이 “동시대성을 감각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려볼 때,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비평의 방향이 어느 쪽인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양경언의 걸음은 그가 써왔던 2010년대와 지금-여기 문학에 필요한 비평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양경언의 비평이 시작되는 지점, 우리가 맞닥뜨릴 어떤 현장에서 또다시 그와 함께일 거라는 확신이 있다. 무너지지 않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움직임이라는 것 역시도. 언제가 되더라도 양경언은 세심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우리의 ‘안녕’을 물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의 감각을 공유하며 읽고/쓰고 있다는 사실만이 지금 내겐 더없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