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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동옥 申東沃
1977년 전남 고흥 출생.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고래가 되는 꿈』 『밤이 계속될 거야』 등이 있음.
poetman77@hanmail.net
에레혼
박속같이 하야니, 달 떴나 먹장 같은 어둠 속인 것을. 무슨 무슨 산이 있는 모양이고 물줄기에 폭 안긴 마을이다. 마루에 댓돌에 문고리 하나까지 이상스레 낯익다. 처마 아래로 구멍을 얼기설기 가려 세운 바람벽. 윗목에 죽은 듯 모로 누워서 이마 위로 새벽빛 떨어지는 쪽창을 올려다본다. 팔을 휘저어 살피니 아내와 딸아이는 곁에 곤히 잔다. 여긴 또 어딘가?
이제 갓 들어선 꿈속 같기도 하고. 어디가 남이고 어디가 북인지 가늠이 없다. 젖니 돋는 울음으로 짓씹어놓은 듯, 말간 손톱 같기도 한 것이, 배꽃 벚꽃 꽃 이파리 날리는 가지 끝이 환하다. 선반에 놓인 채반에서는 달래 냉이 푸릇푸릇 익어가고. 봄나물 한움큼 뜯어 뜨끈한 국물이라도 끓여 마주 앉으려나. 향긋한 찻잔을 잡고 구름 밖의 봄노래라도 아껴 들으려나.
그래도 올봄은 헛되지 않아 즐거이 보내게 되었답니다. 애써 상을 내놓고 돌아서는 주인장은 덤덤하니 말을 아낀다. 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봄 하늘, 발아래로는 폭신한 황토밭이다. 머리 위로는 부드럽게 주름진 이파리들이 연신 몸 뒤채는데. 돌아오는 길에 물으니 그이에게는 오래 묵은 병이 있다고. 그러냐고. 끄덕이면서도 무슨 병인지 묻지 않았다.
미탄
방림 넘어 미탄 지난다.
미탄(美灘)에서 바위는 비로소 주저앉는다.
감아 옥죈 물길을 풀어놓고 무너진 바위
양어깨를 치고 넘는 물살에
일없이 비칠대는 강원도 소나무
눈썹까지 털모자를 눌러쓰고
차령(車嶺) 이북으로 밀려가던 밀정들처럼
북으로 또 북으로
고개를 빼고 나란하다.
물도 나무도 방향을 정해 흐르고 기우는데
사람 사는 데라고는
장마당에서 골목까지 잘고 멀고
아스라하기만 하다.
조양강 물살은 씨앙씨앙
굽이쳐 도는 물길에 비하자면
맥없이 사랑이라고
노래라고 부르는 물건은
느닷없이 고즈넉한 정처 없음
누가 이런 데 정붙이고 살자, 처음
아라리를 불렀을까? 애먼 짐작에도
강 하나에 읍 하나, 몽땅 품어 안고
넘치는 물빛 지도 하나 그려놓은
거기, 정선에서
철이 덜 들었더라면
사북이나 고한 그런 이름이나 맴돌았으련만
미탄 지나며 보았다.
사북이니 고한이니 딴 세상 사정이라는 듯
바위는 여전히 새까맣더군.
검은 바위 아래 오십년을 누워
기다렸을까, 한세상
건네 한데 모시자고 어머니
잠든 아버지마저 깨워 일으켰다 했지.
한번을 붓끝에 올린 적 없는 아버지련만
산 이름이 하필 문필봉(文筆峰)이랬나.
꽃피는 기압골은 평창 방림 지나
미탄 정선을 치받아 북상 중인데
기우뚱
웃자란 소나무에 먹을 찍어
합장(合葬)이라고 써본다.
느닷없이 물길이 한데 모이고
장단이 무장무장 포개 울리더니
오래 묵은 강물 옆구리로 단숨에
숲 하나 들어차 안기는 저물녘
녹음 짙은 어둠에 기대서
녹음 짙은 어둠에 잠겨서
한동안 여리고 먼 빛을 바라보고 서 있었지.
내내 그럴 것 같은 예감에 기대서
내내 그럴 것 같은 예감에 잠겨서
방림 지나 미탄 돌아
정선에 들면
그저 또 미탄하고 미탄한 삶이
조양조양 잠기다
씨앙씨앙 스미는
물소리 바람 소리조차
그저 또 미탄하고 미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