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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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鄭載學

1974년 서울 출생.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모음들이 쏟아진다』 등이 있음.

3jhjung@hanmail.net

 

 

 

내 손바닥보다 큰 달팽이

 

 

달팽이가 위를 향해 쭈욱 기지개를 켜듯 일어나 내가 뿌려주는 비를 맞는다. 아들이 “달팽이가 오~예! 하는 것 같다”며 좋아한다. 똥도 항상 치워주고 물도 뿌려주고 해서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다고 했더니, 아내가 매일 먹을 것을 준 건 자기라고 우기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들이 공평하게 우리 셋이 키웠다고 한다. “아빠 손바닥보다 더 컸는데 구워 먹을까?” 했더니 “지금 달팽이 기분이 좋은데 구워 먹자고?” 아! 그렇구나! 그건 좀 잔인하네. “그럼 내일 구워 먹을까?” 했더니 “왠지 슬퍼” 그런다. “알았어, 안 먹을게. 좋지?” 그래도 아들 덕분에 살았다. 달팽아, 이만큼 클 줄은 몰랐다. 애 다섯살 때 유치원에서 준 새끼손톱보다 작던 백와달팽이. 수명이 이년 정도라는데 삼년 동안 촉촉한 가족이 되어주었다. 잠 안 오던 밤에 내 이야기도 가끔 들어주었다.

 

 

 

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3

 

 

나만 보았던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모습,

가쁜 숨으로 흔들리시며 인공호흡기를 끼우던 그때

투명한 유리막 사이로 내가 힘내라고 주먹을 불끈 들었을 때

아버지도 천천히 함께 주먹을 들었다.

사람에게 슬픔저금통이 있다면

그때 꽉 차버린 것 같다.

묻어버리고 찾고 싶지 않은 슬픔저금통.

이년이 되었지만

그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아직 말하지 못했다.

 

요즘은 멀쩡하게 가던 시계를 손목에 차면 죽어버린다.

이상해서 아내 손목에 채워보니 잘 간다.

 

아버지, 이제 타르 같은 감정들을 버리려고 합니다.

불친절했던 그 마지막 의사도

항암제 맞고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자기 투정만 하던 그 인간도

이제 제 슬픔저금통에서 쏟아버리려고 합니다.

가끔은 내가 왜 아버지를 선택해서 태어났을까,

아버지는 왜 저를 선택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버지와의 많은 엇갈림들이 나의 정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시인으로 키우신 것 알고 있습니다.

시 몇편 쓰고자 저는 아버지를 선택했고요.

 

이제는 저나 아버지나 아무 엇갈림 없이도 시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지금처럼 시계를 죽이는 일도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