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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용목 愼鏞穆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 등이 있음.
97889788@daum.net
국자
솥은 펄펄 끓고
사람들은 몰려드는데 몰려와 앉는데
국자가 없었다
솥은 펄펄 국을 끓이고
흰밥은 밥그릇에 국그릇은 상 위에
하얗게 놓여 있고
사람들은 빈 국그릇을 보다가 펄펄 끓는 솥을 보다가
동생과 나를 쳐다보는데
국자 없이는 국을 풀 수 없고 국 없이는 흰밥에도 목멘 얼굴들 캑캑거리며 다시 동생과 나를 쳐다보는 눈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흘러
사람들 모두 솥처럼 뜨거워지고
어제는 멀쩡히 있었던 국자가 오늘은 감쪽같이 사라진 국자가 어제처럼 사라진 국자가
동생과 나를 국처럼 끓게 하고
동생은 내 손을 잡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국자 좀 빌려주세요
앞치마를 두른
할머니
국자를 들고 말했다 국자가 없다고
국자잖아요
아니라고 말했다
국자잖아요
동생은 국자를 보고 나는 국자 손잡이를 쥔 손을 따라 고개를 젖히면
할머니는 해에 대고 국자를 흔들며
이건 말이야
침을 튀기며
기둥이라고 집이라고 여기에 생활이 있고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다고
말하고
빈집 솥을 휘젓는 것은 죽은 자의 몸속을 휘젓는 것이라고
시체를 펄펄 끓여 인생을 퍼내는 것이라고
솥 바닥 같은 슬픔만 남기는 것이라고
어두워지는 수돗가에 허벅지를 다 내놓고 앉아 눌어붙은 살을 벅벅 문지르게 될 것이라고
죽음을 깨우게 될 거라고
들으며
나는 꿈이 깨면 현실인 것처럼 죽음을 깨우면 삶이 되는 거잖아요 생각할 뿐
말하지 못했다
그새 국은 다 식고
국을 데우려고
나는 옷을 벗고 동생을 세워 옷을 벗기고 한 발씩 잡아주며 빨간 국물 속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흰밥을 남기고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생일날에는 누구나 죽고 싶은 줄 알았다
삼색볼펜
내 필통 속에 삼색볼펜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가방 속에 필통이 있고 필통 속에 여러개 볼펜이 있다는 것과
하나의 볼펜 속에 세개의 심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하나의 가방 속에 세개의 필통을 집어넣는 사람의 마음과 어떻게 다른가
내 몸속에 세개의 마음, 그것은 합쳐진 것인가 쪼개진 것인가
처음 삼색볼펜을 만든 사람도 내게 삼색볼펜을 건넨 사람도
모르겠지만
길게 줄을 긋는다
세개의 색깔은 서로를 알아보는가,
빨간 돌 다음에 파란 돌을 올려놓는 것처럼 파란 실 끝에 빨간 실을 묶는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 끝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라면 차례차례 등장하는 것이
마음이라면
하필 비 그친 하늘, 무지개는 어떻게 저 많은 색깔을 한꺼번에 피워내는가
파란색 볼펜으로 쓴 말들은 아득하게 펼쳐진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혹등고래의 길이 이어지고
파랗게 어두워지는 깊이쯤 가라앉은 배,
부드럽게 죽어가는 수초들 사이에서 녹슨 갑판이 혹등고래의 눈을 뜬다
번갈아 똑딱이는 소리처럼 별들이 바다 위를 빙빙 돌며 길을 잃게 만든다
빨간색 볼펜으로부터 타오르는 이야기, 모든 불꽃이 하나의 작고 둥근 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성냥 머리처럼 붉게 묻은 생각에 하얀 종이를 구름으로 펼쳐놓고 기다린다
부딪쳐라, 바람에게
하늘을 다 태우는 저녁을 주고 싶다
나는 내 몸속에 쓰인 붉은 글자들을 안다 사막이 많은 나라의 문자처럼
바다를 잃어버린 내 몸의 해변을 돌고 도는 핏줄들,
매번 새롭게 쓰여지고 매번 까맣게 지워지는 내 몸의 파도를 아무도 읽지 않아서
나는 오래 걸었다
무릎께에서 쉬고 허리쯤에서 묵는 생각의 저녁을 붉은 화농으로 키우며
검은색 볼펜으로 쓴 죽음들
밤,
그 속에 무언가 갇혀 있다 어둠의 캄캄한 벽을 조금씩 밀어내며 오직 머리로만 남아 있는 그것들이
세개의 눈동자를 갈아 끼우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