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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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범 韓在範

2000년 광주 출생. 2019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just_blank00@naver.com

 

 

 

신이 앉은 식탁 아래

 

 

어떤 밤에는 함부로 깨닫게 된다 나 이제 알 것 같아, 하는 얼굴을 한 사람이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다 그는 포개진 두 손을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 이제 알 것 같아

 

초는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게 아니야 혼자 타 죽어가는 걸 곁에서 방관할 뿐이지 그의 작은 입김에 촛불이 꺼진다 입김에 불어난 연기가 시야를 흐린다 지금 내 앞에는 혼자 눈을 감은 사람이 놓여 있고

 

다 녹지도 못한 초가 쓰러진

 

2인용 식탁이다 기도는 서로를 마주 보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할 말과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잘 구분한다 아직 오지 않은 이가 있어 식사가 끝나지 않는다

 

무언가의 존재를 열심히 믿는 사람의 얼굴은 텅 비어 있다 때론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무서웠고 때론 믿지 않았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빈 그릇 앞에 내가 놓여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눈을 감은 사람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집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이가 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를 믿는 사람일까 나는 자주 떠나고 싶다 누군가 간절히 내 존재를 믿었으면 한다

 

이 집에서

아주 오랫동안

내가 살았다고 한다

이 집으로부터

이 집까지

잘 전해지길

 

계속 눈만 감으면 신이 오는지 도둑이 오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을 때 눈을 감던 사람이 말한다 눈을 감았지만 확신에 찬 얼굴로

 

보이지 않아? 이 흔적들이

 

그가 이미 우리에게 왔다 간 거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침까지 튀기며 설명하다 그만 숟가락을 떨어트린다 내 앞의 그는 이제 몸을 숙이는 사람이다

 

조그만 식탁 아래로 무릎 꿇은 그가 들어갔고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깊고 눅눅한 밤이다 눈을 뜨든 감든 보이는 것이 없다 나를 발견할 수조차 없는 방이다 오래도록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믿어야 했다

 

 

 

 

 

종에 대해 생각해봐

윤의 말이었다

 

윤은 학교도

교회도 아니어서

종 같은 걸 가지지 않았고

윤에게 종은 막연했다

그런 건 보통 큰 건물에

매달려 있는 거라고 내가 말했고

종을 본 적이 있어?

종소리는 들어봤는데

종은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윤에겐 등나무 아래서 하늘을 바라보는 취미가 있다 늦기 전에 올게 말만 남기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조그만 마을을 내려다볼 언덕과 오래간 비어 있는 교정이 있다 내가 있다

 

등나무 아래에 서면

내가 너무 평범한 얼굴 같았고

 

조심해, 언덕을 오르다

목줄을 쥐듯 나를 잡아당기는 손

나는 종을 보지 않아도 됐는데

 

종이 울리면

종이 있을 거야

마을을 내려다보는 윤의 말에

종소리를 기다린다 내게

가끔 윤은 학교이자

교회였기 때문에

 

큰집에 불이 났어 아주 큰 불이야 어서 도망쳐야 해 불이 마을 전체를 뒤덮을 거야 이웃들이 소리쳤다 소리치는 이웃이 번져나갔다 얼마나 더 이어질까 기대를 만드는 불이다 이렇게까지 영원하게

 

소모된 집들이

무너져 내렸고 서둘러

손을 잡아당기자

흔들리는 윤

소리 내는 윤

제자리에 묶인 듯

움직이지 않는 윤

 

따라주지 않는구나, 내가 말하지 않았고

 

윤의 마지막 말이었다

더는 윤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