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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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1972년 서울 출생.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가 있음.

yhpoem72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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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건 없었다

여기, 세간을 다 버리고

이제 나만 남았으므로

 

상자는 그럴 때 도착한다

엄마가 보낸 상자가

날 선 소리를 사방에 흘리고 있다

 

상자 속에서 번개가 친다

닫힌 귀들이 사납게 치켜든 깃발과

틈을 노리며 뱀처럼 기어 나오는

확성기를 든 노여운 입술들

 

어쩌면 좋아, 저 무거운 상자를

 

소나무는 참 한결같다더군

무릎 아래 어린 잡목들이 영영 자라지 못한다고

싹 다 죽인다고

 

엄마, 내겐 빈 상자가 필요해요

그래도 어쩌겠니, 내겐 이게 전부인걸

백년 묵은 소나무처럼 엄마는 자꾸 진물을 흘린다

 

너희가 아는 것은

다 가짜, 가짜다아아앗,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다 더럽히고 나서야

그것은 겨우 빈 상자가 되었다

 

빈 상자에 나는 구겨져 들어갔다

이번에도 맞지 않아, 나는 투덜투덜

넘치는 손목과 삐져나온 발은 잘라 내던지고

내 목소리만 겨우 집어넣고서

 

피는 잘 닦고 갈게요

상자는 착불로 보내주시고요

나머지는 아무 데나 버려주세요

 

새로 올 세입자에게 메모를 남기고

나는 꿈에서 빠져나왔다

 

 

 

친구의 집

 

 

가을에는 친구의 집에 있었다

친구 없는 집에서 오래된 음반을 틀고

흰 우유를 데워 마시면서

내 친구를 나인 듯 사랑하라고?

누군가의 밑줄을 다시 꺼내 읽었다

그 집 창문에 구름이 다 사라질 때까지

어른거리며 흩어지는 마음을 쥐었다 폈다

팔을 길게 휘저어 골똘히 닦으면서

그런데 친구는 어디에 갔을까

저물 무렵 굴속에서 뛰어나오는 토끼처럼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생각에게

내 얼굴에 미처 익숙해지지 못해

잠을 따라 들어와 물끄러미 비추는 거울에게

친구답게 인사하는 법을 익히고

생각 속으로 들어간 것이

산토끼인지 죽은 토끼인지 궁금해하며

가을볕 아래 토끼털처럼 제법 따뜻해져가는 친구의 집에서

손톱과 발톱이 자란다

오늘은 거울 앞에서 웃음을 설탕처럼 입술에 묻히기

친구의 카디건을 입고서 다정하게 이야기하기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친구인 걸까

물음표처럼 자꾸 구부러지는 몸을 펴고

의자에서 일어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밖에는 내가 서 있어

나는 드디어 친구처럼

나를 활짝 끌어안았다